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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애국심 패션

Posted June. 17, 2002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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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포르투갈을 누르고 16강에 진출하던 밤에 50만 인파가 모여든 서울 세종로 일대는 애국심이 넘실거리는 바다였다. 감격에 북받친 젊은이들이 밤이 깊은 시간까지 어깨동무를 하고 서울시내 주요 거리를 누볐다.

붉은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은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하이 파이브를 했다. 두 사람이 양손을 펴서 마주치는 서양식 문화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보편화된 것을 새삼 깨닫게 했다. 심지어 줄지어 행진하는 전경들도 야광 경찰봉을 흔들며 대한민국이라고 외쳤다.

월드컵은 국가간 총성 없는 전쟁 같은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한껏 자극한다. 인종의 백화점 같은 프랑스팀에서 무슨 민족을 찾을 수 있느냐는 반론이 있지만 전쟁에는 본래 용병도 있고 다국적군의 지원도 따르기 마련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16강전은 멕시코인들에게 일종의 대리 전쟁이었다. 멕시코는 184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캘리포니아 텍사스주 등 영토의 절반 이상을 빼앗겼다. 비센테 폭스 멕시코 대통령은 각료회의를 소집해 전주 경기를 시청했고 미국에 숨어사는 멕시코 불법이민자 300만명도 이 경기를 보았다. 미국의 월등한 경제력과 군사력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는 멕시코인들은 미국과의 축구 경기만은 결코 내줄 수 없다는 각오가 비장했으나 패배해 국민적 좌절감이 클 것이다. 월드컵 축구에는 축구 이상의 무엇이 있다.

오늘 한국팀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진출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세계 1위의 프랑스팀이 한 골도 못 넣고 16강 진출에 실패해 일찌감치 집으로 간 것을 보면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이라는 것이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상대팀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세계 5위인 포르투갈을 집으로 가게 했으니 6위 앞에서 겁을 낼 일은 아니다.

만약에 한국팀이 8강을 넘어 4강에 진출해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준결승전에 올라간다면 그 뒤에 일어날 일은 상상을 절한다. 한국인들의 집단 희열감은 상암 구장 앞 200m짜리 분수보다 더 높이 솟아오르고 애국심이 해일처럼 밀려와 반도의 남쪽을 덮어버리는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체험한 나이든 분은 지금까지의 경기 결과만으로도 광복 이후 최고의 감동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6월의 흥분이 가시고 나면 7월부터는 무엇으로 살 것인가. 벌써부터 월드컵이 끝난 뒤의 공허감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월드컵이 가져다준 감동은 7월의 태양이 작열하기 시작하면 빛이 바래기 시작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쉽게 달구어지고 빨리 식는 양은그릇이라고들 한다. 축구든, 무엇에 대한 열정이든 짧은 기간에 펄펄 끓다가 금세 싸늘해진다는 것이다. 월드컵이 끝나면 국내 K리그의 선수들은 다시 텅빈 스탠드를 바라보며 경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팀이 출전하는 날에는 태극기 치마와 태극기 망토를 걸치고 볼에 태극마크 페인팅을 하는 애국심 패션이 등장한다. 그러나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이길 때 흥분하다가 곧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애국심이라면 그것은 패션 이상의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이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한다면 공동체를 구성하는 시민으로서의 덕성이나 의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서울 세종로에 모인 인파는 쓰레기를 한 곳에 모으는 시민의식을 보였지만 시내 일부 지역에서는 도로교통을 마비시키고 정차돼 있는 버스와 승용차의 지붕과 보닛 위에 올라가 구르는 훌리건의 행태를 표출했다.

이런 형편에 16강 진출이 좌절됐다면 러시아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고 걱정이 된다. 프랑스팀의 조 예선 탈락에서 보듯이 승부의 세계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 결국 지기 위해 이긴다는 말은 절묘한 반어법이다.

월드컵 경기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느라 목이 쉬었을 젊은이들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얼마나 투표를 했을지도 궁금하다.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 선거 가릴 것 없이 20대의 투표율이 가장 낮다. 40대 이후 세대는 거리에서 열정적인 애국심을 표출하지는 않지만 지방과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선거가 다가오면 젊은이들 이상으로 고민하고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우리를 하나로 묶었던 뜨거운 열정이 짧은 생명의 패션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린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광복 이후 최고조라는 국민적 열기의 에너지가 공동체에 대한 지속적인 사랑으로 이어지고 정치 경제 등 다른 부분으로 확산돼야만 한때의 패션을 넘어 진정한 애국심으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

황호택 (논설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