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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리더십 보수-개혁파 모두 호평

Posted November. 08, 2002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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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의 일생에서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같은 혁명 1세대의 치열함을 찾기는 어렵다. 1세대 혁명 원로들이 중국 대륙에 광풍을 몰고 왔다면 후진타오는 그 광풍에 휘둘리며 처세()해 온 측면이 크다.

후가 차세대 최고권력자로 낙점받은 것은 최연소 당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 오른 1992년10월이다. 같은해 1월 덩은 선전(쉌)일대를 돌며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개방의 불가피성을 설파하고 있었고 그 흐름을 대세로 굳히고자 상무위원회 내 젊은 피의 수혈을 필요로 했다.

중국 내부는 물론 일본 및 홍콩 언론들도 이때부터 후의 권좌 등극을 시간문제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화혁명(19661976)의 아수라장에서 굴신()의 미덕을 배웠던 후는 오히려 몸을 낮췄다. 덩이 과도기 지도자로 점 찍은 장쩌민()이 한창 국가지도자로서 권위를 세우고 있었던 때였다.

후는 항일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2년 12월 안후이()성에 기반을 둔 차()상인의 장자로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마오 시절 부친 후쩡위()는 소규모 자본으로 가족이 경영하는 소업주() 계급으로 분류됐다. 소업주계급은 혁명의 타도 대상도, 주체세력도 아닌 중간계급. 이 출신 성분은 후의 성장과 향후 처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세가 기울자 부친은 가족들을 장쑤()성 내륙 타이저우()로 옮겼다. 이곳 소학교(초등학교) 어문선생님이 내준 나의 꿈이란 글쓰기 숙제에 후 소년은 큰 배를 몰고 바람과 파도에 실려 세계를 돌고 싶다고 썼다. 내륙 산골학교 학생 중 그런 꿈을 가진 소년은 후밖에 없었다.

후가 중국 최고의 명문 칭화()대 수리공정학과(발전소 전공)에 입학한 것은 불과 17세 때의 일. 오지 근무가 잦아 기피 학과였던 수리공정과를 택한 것은 소업주 출신이라는 한계 탓에 인기학과 합격을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후는 공산당청년단(공청단)에 입단했다. 공청단 지부 문화공작단 서기를 맡은 그는 사교춤의 리더로 인기를 독차지했다. 공청단은 1970년 화궈펑()과 덩이 최후의 권력 투쟁을 벌일 때 공청단의 리더였던 후야오방()이 덩을 지지한 이후 본격적인 권력단체로 떠올랐다.

1966년 문혁의 광풍에 떠밀려 오지인 간쑤()성에 배치된 후는 평생의 정치적 후원자인 쑹핑() 당시 성서기를 만난다. 쑹은 후를 한눈에 알아보고 성 건설위원회 서기에 앉혔고 나중엔 후야오방에게 천거, 공청단 서기를 맡겼다. 1992년 후가 상무위원에 오른 것도 쑹이 내 상무위원 자리를 후에게 넘겨달라고 차오스() 등을 설득한 결과였다.

후는 쑹 전 위원이나 천윈() 등 보수원로는 물론 개혁파에게도 통하는 인물이다. 1989년 티베트자치구에서 일어난 무력 소요는 보수파가 구이저우()성 당서기였던 후의 당성()을 믿고 군을 급거 파견했기 때문에 조기 수습할 수 있었다. 후는 당시 철모를 쓰고 무력진압에 나서 당이 위기에 처하면 결연하게 대응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반면 당내 민주화를 중시하고 가무에 밝은 사교적인 면은 개혁파에게서도 친근한 평가를 받는다. 기본적으로 장쩌민 등 3세대 정치인들과 달리 후는 개혁 개방시대에 정치 이력을 닦았다.

후의 정치적 성향 등은 구체적으로 드러난 적이 없다. 그의 정치 보고 강연 등에는 혁신적이거나 대담한 표현이 거의 없다. 현재로서는 강력한 카리스마보다는 국내정치 컨센서스를 중시하는 합리적 리더십을 보일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당헌에 따라 70세까지의 임기가 보장되는 그에게 카리스마와 조직 장악력 부족은 상당한 부담이다.



박래정 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