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한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 부국장(59)은 그 후로도 30년 동안 탐사보도 전문기자로 활약하고 있다. 그에게 걸리면 중앙정보국(CIA),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국방부 등 비밀스럽게 작동하는 어떤 기관도 실체를 드러내고 만다. 특히 새로 집권한 행정부는 그에게는 좋은 먹잇감. 그는 93년 집권한 빌 클린턴 행정부의 내부를 폭로한 어젠다(agenda)를 출간한 데 이어 19일에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내막을 파헤친 전쟁 중의 부시(Bush At War)라는 책을 낸다. 이 책은 부시 대통령과의 4시간에 걸친 단독회견을 비롯해 주요 인사 100여명과의 대화를 토대로 쓰여졌다. 다음은 16, 17일자 워싱턴포스트에 보도된 책 내용 요약.
권력의 암투9월 12일 유엔총회에서 부시 대통령의 연설을 지켜보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한 대목에서 숨이 멎는 듯했다. 부시 대통령이 수정 이전의 원고를 읽고 있지 않은가. 부시 대통령은 이어 말을 더듬다가 우리는 필요한 (대 이라크) 결의안을 위해 유엔 안보리와 함께 일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파월 장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로 이 한 대목을 위해 그동안 권력 내부에서 벌여온 전투가 그의 승리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라크에 대해 미국 단독으로 군사공격을 벌여야 한다는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에 맞서 국제공조론을 주창해 왔다. 그 공조론의 핵심은 유엔 안보리에서의 대이라크 결의안 통과.
그는 단독 공격론으로 기울던 8월 5일 부시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국제공조론에 대한 지지를 끌어냈다. 그럼에도 유엔 연설문안을 놓고 체니 부통령과 럼즈펠드 장관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연설 전날 밤에야 최종적으로 유엔결의를 촉구하는 내용을 삽입할 수 있었다. 파월 장관은 칼 로브 백악관 정치보좌관에게도 견제를 당했다. 로브 보좌관은 파월 장관의 중도주의 노선에는 부시 대통령을 희생하고서라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고 판단했다.
911테러 이후 수개월 동안 파월 장관은 백악관으로부터 TV 출연금지 명령을 받았다. 그는 이때를 냉장고(icebox)에 들어가 있던 시절로 묘사했다고 그의 측근인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이 밝혔다. 하지만 군부에게서는 지지를 받아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은 직속 상관인 럼즈펠드 장관을 젖혀놓고 파월 장관에게 직보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 같은 암투 속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외교안보보좌관에게 의존했다. 그는 라이스 보좌관을 매우 철저하고 항상 암탉처럼 나를 보살펴 주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아프간전쟁의 비밀부시 행정부도 아프간 전쟁이 그렇게 일찍 끝날지 몰랐다. 한때는 5만명의 지상군을 파병하는 방안도 검토됐을 정도.
조기 승전은 아프간 군벌들의 지지를 얻은 데서 가능했다. 이를 위해 CIA의 6개 팀은 100달러짜리 지폐로 7000만달러를 아프간에 뿌렸다. 10명으로 구성된 딱딱한 캔디(Jawbreaker)라는 암호명의 선발대는 지난해 9월 27일 가방에 300만달러를 들고 아프간에 첫 상륙했다.
부시 대통령의 성격그는 스스로를 교과서적 인간이 아니라 직관과 육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때론 불같이 화를 내곤 한다. 그는 이제 세계평화를 성취하기 위한 기회를 잡을 거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비전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선제적, 그리고 때로는 일방적 행동을 통해 세계질서를 재정립하려는 야망을 표시하면서 이라크에 대해 먼저 얘기했고 바로 다음으로 북한과 독재자 김정일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국제관계를 개인관계로 치환하곤 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어머니로부터 십자가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감동한 그는 바로 앞으로 블라디미르라고 불러도 괜찮겠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한 언론인의 편지부시 대통령은 전쟁에 대한 언론의 반응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911테러 수주일 후 폭스 뉴스채널의 로저 에일즈 회장은 그에게 비밀 사신을 보냈다. 대통령께서 (테러에 대한 대응으로) 가능한 한 가장 가혹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여론의 지지가 사라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폭스 뉴스는 가장 보수적인 언론으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