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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007

Posted January. 02, 2003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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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는 일정한 틀을 지니고 있다.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은 백인 일색이다. 이들은 얼굴이 잘생기고 몸매도 쭉쭉빵빵 늘씬하며 부자들이다. 유색인은 악당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가난하고 섹시한 매력도 없으며 무지한 집단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또 다른 특징은 서방세계를 정의로운 선의 집단으로, 나머지 세계를 악의 집단으로 설정해 결국 서방세계가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영화 007시리즈는 이 같은 할리우드의 기본 틀이 잘 용해되어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고의적으로 서방세계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 같은 얼개를 채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서방세계가 만든 영화이므로 그들의 세계관 가치관이 드러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아야 한다. 영화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대중문화이며 세계 영화시장의 80% 이상을 할리우드 영화가 장악하고 있다. 이처럼 현실적으로 할리우드의 파워가 막강하기 때문에 이를 반복적으로 보면서 그들의 논리나 선입견에 동화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로선 할리우드 영화를 오락으로 즐기되 비판적 안목도 함께 갖춰야 한다.

007 어나더데이가 뜨거운 논란을 빚고 있다. 개봉 이전부터 인터넷에서는 안티 007운동이 벌어졌다. 북한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한반도 냉전을 부추긴다는 이유다. 영화가 시작된 후 한 시민단체는 상영관 앞에서 영화를 보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영화가 좋고 나쁨에 대한 의사 표시는 영화팬 모두의 즐겁고도 짜릿한 권리다. 영화를 본 사람은 누구나 혹평을 가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이번 사례가 좋고 나쁨을 가리는 수준을 넘어 불매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문화활동에서 가장 존중되어야 할 것이 창작의 자유다. 문화계에서 외설 작품에 대해서까지 법적 제재를 반대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그로 인해 창작의 자유가 위축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어나더데이에 대한 불매는 우선 우리 내부의 표현의 자유를 해치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 할리우드의 세계 지배 이데올로기에 염증을 느껴 이 영화에 반대한다면 우리는 어떤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 대중문화 작품들이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기본적으로 영화에 대한 평가는 관객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꼭 007을 보아야겠다는 사람들이 불매운동으로 인해 영화관에 들어가면서 괜히 떳떳하지 못한 기분을 갖게 만든다면 그것은 횡포가 아닐 수 없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