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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 떠난 황새더 높이 날아라

Posted February. 09, 2003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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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을 처음 시작했던 구리 양정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새벽마다 어린 황선홍의 허리와 택시를 끈으로 묶은 뒤 천천히 택시를 몰았다. 택시가 달리면 같이 달려야 했다. 그러나 황선홍은 육상보다 축구가 더 좋았다.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어느 날 축구화를 사주었다. 문방구점에서 팔던 값싼 비닐제 신발. 황선홍은 그날 그 축구화를 가슴에 안고 잠이 들었다.

황선홍의 별명 황새는 비쩍 마른 몸에 키만 멀대같이 크다고 해서 붙여진 것. 가난했던 아버지는 이 별명을 누구보다 가슴아파 했다. 용문중 시절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있던 아버지가 목발을 짚고 경기장으로 찾아왔다. 아버지는 깁스를 한 탓에 내내 서서 아들이 뛰는 모습을 지켜봤다. 황선홍은 그 때 난 90분 내내 울면서 뛰었다고 회상한다.

9일 오후 서울 타워호텔에서 지도자의 길을 걷겠다며 은퇴를 공식선언한 황선홍(34전남). 그는 기자회견 도중 자주 허공을 바라보았다. 축구를 시작한 지 올해로 24년, 축구선수 황선홍을 마감하는 이 자리에서 그는 아버지가 처음 사준 비닐 축구화를 떠올렸을 게다. 지난해 월드컵 폴란드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리고 아버지를 외쳤을 때처럼.

황선홍이 은퇴를 결심한 것은 부상 때문. 무릎 인대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고 이밖에도 아킬레스건 허벅지 등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려왔다. 월드컵이 끝난 뒤 일본 가시와팀으로 복귀했지만 부상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퇴출. 이어 지난해 9월 전남과 계약하면서 국내무대로 돌아왔으나 한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황선홍 축구는 곧 한국축구였다. 첫 태극마크를 단 아시안컵대회 일본전에서 헤딩골을 터뜨리며 화려하게 국제무대에 신고한 게 건국대 2년 때인 88년 12월. 이후 A매치에 103회 출전해 50골을 뽑는 등 아시아 최고골잡이로 명성을 날렸다. 국내 프로무대에는 64경기에 출전해 31골 16도움. 일본프로축구 J리그 세레소 오사카시절에도 99년 24골로 득점왕에 오르는 등 70경기에서 42골을 기록한 그다.

그러나 운동선수는 언젠가는 그라운드를 떠나야 한다. 황선홍도 그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 황선홍은 그 숙명의 순간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을 생각이다. 바로 지도자의 길이다. 전남구단도 그를 코치로 영입했다. 이에 따라 터키 전지훈련중인 전남 선수단이 돌아오는 대로 2군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황선홍은 은퇴결심을 굳혔던 최근 전남구단에 그동안 받았던 3개월치 급여 6000만원을 반납하겠다고 밝혔다. 구단은 이 돈으로 황선홍 장학회를 세워 전남지역 유소년축구기금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월드컵대표팀 감독이 되고싶다. 2002월드컵의 영광을 재현하고 가능하면 우승까지도 이뤄보고 싶다.

황새의 날개는 아직 접히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모두 황선홍의 새로운 출발에 박수를 보내자.



김화성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