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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정치'

Posted August. 10, 2003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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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것은 1960년대였다. 당시는 세계를 양분한 냉전 이데올로기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다. 한편에선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가 주창되었고 다른 한편에선 그것을 지식인의 아편이라며 배격했다. 그런 시대였기에 이데올로기의 종언도 무슨 잠꼬대처럼 들렸다. 그러나 80년대를 지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련의 해체, 여기에 더해 중국의 시장사회주의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세계는 확실히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삶의 정치로 옮아가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거꾸로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마치 변화의 역행지대처럼 보인다. 북한에는 지금도 핏빛 이데올로기의 구호가 거리마다 넘치고 있다. 한국도 북한과 별반 다르지 않다. 좌우를 넘어선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은 의례적으로 오가지만, 내면에서는 80년대식 이념갈등이 여전히 기승을 부린다. 며칠 전 미군 장갑차에 뛰어올라간 한총련 대학생들의 과격한 주장이 가까운 예다. 좌우 공존을 말하면서도 이념적 대결구도에 매달리는 이중성이 강화되는 양상은 우리 사회의 비극이다.

이데올로기는 사유의 한 가닥이자 미래에 대한 기대 논리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정치는 인간을 관념의 노예로 전락시킨다는 것은 지난 역사를 통해 입증됐다. 당면문제의 해결을 중시하는 자세가 그래서 중요하다. 우파의 경험도, 좌파의 모험도 현실에 바탕을 둘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삶의 정치에서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 예전처럼 냉혹하지 않다. 필요하다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으는 열린 정치로 달려가는 것은 범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만 그런 대세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날 이데올로기 때문에 민족분열과 전쟁을 치렀던 우리 사회에 아직도 민중해방 구호를 신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로 인해 국민은 사분오열되고 국가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에겐 조국과 민중이 따로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특정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집단만을 민족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겐 민족을 말할 자격이 없다. 냉전적 사고와 구태의연한 이데올로기 정치의 고리를 끊고 열림과 연대로 달려가는 것이 이 시대에 걸맞은 삶의 정치를 실현하는 길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과제가 아니겠는가.

진 덕 규 객원논설위원이화여대 교수

dkjin@ewha.ac.kr 송문홍논설위원 songm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