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의 마지막 성화주자 캐시 프리먼을 기억하는가. 호주 원주민(애버리지니) 출신 육상 선수인 프리먼은 400m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낸 뒤 호주 국기와 함께 원주민기를 들고 트랙을 돌았다. 유럽인의 호주 이주 이래 200여년 동안 질병과 학살, 가난과 불이익 속에 고통 받았던 원주민들에게는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올림픽의 스타 프리먼은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호주가 취한 격리정책 때문에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도대체 호주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 영화 속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
집으로 엄마 찾아 대장정
호주에선 1910년부터 70년대까지 동화정책이라는 명목으로 10만명에 이르는 혼혈 애버리지니 아이들을 가족과 떼어놓았다.
백인의 피가 섞인 아이들을 문명화한다며 그들을 수용시설에 모아놓고 영어와 기독교 신앙을 강제로 주입시켰던 것. 원주민 문화와 언어를 빼앗긴 그들은 하녀 등 백인 사회의 하층민으로 살아가야 했다.
이 영화는 수용시설을 탈출한 아이들의 실화를 토대로 호주 원주민 역사의 한 단면을 서사적으로 그려낸다. 서부의 외진 마을에 살던 몰리, 데이지, 그레이스 등 세 소녀가 강제로 엄마로부터 격리되는 첫 장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라고 했던가. 눈앞에서 아이를 뺏긴 한 원주민 엄마는 자기 머리를 돌멩이로 찧으며 울부짖는다.
동물처럼 우리에 갇혀 여행한 끝에 수용시설에 도착한 아이들. 그들은 엄마가 사무치게 그리울 뿐이다. 엄마 찾아 길을 떠난 그들은 2400km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이 희망이다
지도도, 나침반도, 식량도 없이 떠난 세 명의 아이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한 것은 가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그리고 토끼 울타리였다.
토끼 울타리는 폭발적으로 번식한 토끼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것. 메마른 황무지와 사막을 거쳐 끝도 없이 이어지는 울타리. 가도 가도 끝없는 광활한 대륙을 가로지르는 그 울타리를 따라 아이들이 타박타박 걷는다. 막대기처럼 가는 다리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내딛는다.
영화에선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원주민 소녀들이 억압에 굴하지 않는, 지혜롭고 용감한 주인공들의 모습을 가식 없이 그려냈다. 귀향 그 이후
귀향했다고 모든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장면의 해설을 통해 어른이 된 몰리는 아이 둘을 낳고 수용소로 끌려가고 또 자신의 아이들을 빼앗겼음을 알게 된다. 이 모든 사연이 실제 이야기란 점에서 여운은 더 길다.
마치 우수한 종자를 가려내 사육하듯, 혼혈 피의 희석을 내세우며 아이들의 피부색을 검사하고 하인으로 길들이는 백인들. 이 영화는 백인들의 비인간적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적대감이나 분노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는다. 광활한 대지를 담은 화면을 배경으로 아이들의 험난한 여정을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백인들에게 유린당한 원주민들의 삶은, 그래서 더욱 강한 진실의 힘으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17일 개봉. 전체 관람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