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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 일병과 국가의례

Posted November. 30, 2003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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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인 전용일 일병이 탈북해 고국으로 오려다가 위조여권 소지 혐의로 체포돼 중국에서 구금생활을 하고 있다. 정부가 개입하고 있으나 국방부가 적시에 그의 신원을 확인해 주지 않아 전 일병 구출작전은 난항을 겪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625전쟁 당시의 국군포로 귀환과 베트남전쟁 당시의 국군 실종자 수색작업에 별로 성의를 기울이지 않아 여러 차례 여론의 질타를 받은 바 있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을 정부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유사시 누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려 하겠는가.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 과정은 폭력적이었고 유혈이 낭자했다. 국왕은 세력을 넓히고자 자주 전쟁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전쟁에 동원되는 것 외에도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약탈의 수준에 가까운 조세를 부담해야 했다. 사람들은 이런 폭력적 과정에 대한 강제적인 참여를 통해 역설적으로 일체감과 귀속감이 높아지면서 국민으로 만들어져 갔다. 그런데도 오늘날 사람들은 그들이 당한 폭력에 대한 기억은 모두 잊고 국가를 몸 바쳐 지켜야 하는 고귀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개념을 빌리자면 기원에 대한 집단적 기억상실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 비밀의 답은 국민국가가 유혈적 탄생 이후 꾸준히 해 온 전통의 재창조와 국가의례를 만드는 작업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업을 통해 압제의 상징이던 군주는 어느덧 국가의 상징이자 구심점으로 변모했으며, 폭력의 상징인 군대도 국민의 안위를 지키는 보호자로서 표상되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국민의례 역시 폭력에 대한 기억을 잊게 만들면서 국민적 동일성을 창출하는 새로운 기억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이 중앙신원확인소(CILHI)라는 별도의 부대를 두고 세계 각지에서 미군 전쟁포로와 실종자 수색 및 시신 수습에 나서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유해가 발굴되면 미 정부는 성대한 의식을 준비하고 성조기로 덮은 관()이 운구되면 대통령과 전 국민이 일제히 존경을 표한다. 미국 정부의 이러한 노력과 국가적 의례는 국민에게 조국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줌으로써 일체감과 충성심을 고취하고 있다. 국가의례를 통해 미국 국민은 국가의 폭력성을 잊고 국민적 동질성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나쁘게 볼 일만은 아니다. 적어도 국민국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러한 당연한 기능조차 못하고 있다. 이러고도 과연 국민국가라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김 일 영 객원논설위원성균관대 교수

iykim@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