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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의 나라

Posted April. 28, 2004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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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가 하루 한두 편밖에 운항하지 않고 부산과 목포항도 목선이 오가던 20여년 전. 농사라고는 조와 유채뿐이어서 쌀 과일 등도 모두 목선으로 조달했던 그 시절. 풍랑으로 뱃길 끊기면 몇 날이고 짐칸에서 썩다시피 한 사과마저도 섬에서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라고 섬사람들은 말한다. 끈기 없어 펄펄 날렸던 묵은 정부미 쌀밥은 벌써 옛이야기고 뭍에 나가려면 큰마음 먹어야 했던 생활의 옹색함도 사라진 지 오래니까. 국제자유도시로 지정된 후에는 영어를 섬 공용어로 쓰자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니 그 변화야말로 상전벽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봄의 섬 풍경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연녹색 살짝 감도는 노란 꽃봉오리의 유채꽃 무리가 구멍 숭숭 난 제주 돌로 담장 둘린 너른 밭을 그득히 메운 풍경이나 해넘이의 저녁노을이 푸르디푸른 제주도 하늘과 바다를 붉디붉게 물들이는 것이나 아니면 한밤중 어선들이 고촉광의 집어등을 밝혀 수평선에 어화()를 피워내는 풍경이 그러하다.

그중에서도 꽃으로 뒤덮여 온통 노랗게 채색된 유채밭은 지금도 섬 전역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보는 제주도의 상징적인 풍경이다. 유채꽃 큰잔치(17, 18일)가 열렸던 지지난 주말. 이미 꽃 진 곳도 보였지만 그래도 곳곳의 유채밭은 여전히 샛노란 꽃으로 뒤덮여 대지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정석항공관 근방 들판의 도로는 시속 60km로 10분 이상을 달릴 정도의 긴 구간에 걸쳐 양편이 온통 노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유채꽃밭을 보면서 깨닫는다. 이 봄 섬의 빛깔은 노란색임을. 유채꽃밭의 도발적인 노란 빛을, 수천평 너른 땅에서 햇빛 아래 일시에 노출시키는 그 화려한 빛의 향연을 뭍에서는 즐길 곳이 별로 없다. 어쩌다 관광용으로 조성한 곳도 보이지만 그 풍경과 감흥은 제주 것과 사뭇 다르다. 유채의 노란 꽃 풍경은 하늘 넓은 제주 섬에서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그리고 검은 화산돌 담장 뒤로 보아야 제격이다.

제주는 빛깔 있는 섬이다. 그 빛깔은 다섯이다. 절물자연휴양림의 거대한 삼나무 숲을 보자.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한 숲은 어찌나 푸르고 숲 그늘은 또 어찌나 짙은지 그 안에서 옷을 벗어 쥐어짜면 초록 물이 뚝뚝 떨어질 듯하다. 파란 바다는 또 어떤가. 눈을 일부러 감기 전에는 절대로 시야에서 떠나지 않는 바다만의 세상, 제주의 현란하리만큼 다양한 파란 물 빛깔은 상상을 초월한다. 글 쓰는 게 직업인 기자지만 그 물빛 앞에서는 인간 표현의 한계를 절감한다.

해질 녘 바다와 하늘을 보자.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낙조는 뭍에서도 볼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해넘이 후 서편 하늘의 하얀 구름을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이며 코발트빛 하늘과 보색의 대비를 이루는 저녁노을은 어찌할 것인가.

밤이 되어도 제주 섬의 색깔은 죽지 않는다. 그때 오히려 살아나는 빛깔은 그 어느 것보다도 찬란하고 화려하다. 밤바다에 피어나는 어화다. 불 밝혀 고기잡이 하는 어선 집어등의 하얀 불빛이 반짝이는 밤바다는 섬이 아니면 도저히 볼 수 없는 귀한 볼거리다.

그리고 갈치의 형광 빛깔 비늘과 홍삼의 주황빛깔 연체, 줄돔의 화려한 흑백 스트라이프, 제주 감귤의 노란빛, 차밭의 초록빛, 그리고 뭉게구름의 하얀빛. 섬에서는 먹는 것에서도 빛깔 타령을 늘어놓을 만하다.

이처럼 자연의 빛깔을 그대로 간직한 청정 섬 제주. 그런 까닭에서일까. 예서 찍은 사진은 좀 다르다. 순수한 공기 덕분에 빛깔마저 그대로 투명하게 사진에 나온다. 그러니 앞으로 제주도에서는 그 빛깔까지도 눈여겨보자. 자연의 자연스러움이 그 빛깔에서 오니까. 오염된 자연이 제 빛깔을 낼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조성하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