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생이 기억의 상실과 함께 시작되었음은 분명하다. 최초의 기억이란 기껏해야 두 살에서 네 살 사이의 어느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말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기억의 상실감과 맞물린다. 그 전에 있었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후로도 오래 동안 아무 기억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망각의 긴 어둠 속에서 드문드문 켜진 불빛과 같다.
상식적으로 기억과 망각은 양립할 수 없다. 기억이 끝나는 곳에서 망각이 시작되고, 망각이 끝나는 곳에서 기억은 시작된다. 하지만 이 이분법의 어디쯤에 모호한 기억이 둥둥 떠다닌다. 옛날엔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기억 말이다.
어떤 단어가 혀끝에 맴돌기만 하면서 끝내 생각나지 않을 때를 떠올려보라. 놀랍게도 그 단어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암시한다. 찾고자 하는 단어의 유령 같은 것이 의식의 빈틈 속에서 우리를 향해 손짓한다.
이 책은 우리의 개인사, 우리 삶의 연대기와도 같은 자전적() 기억의 여러 문제들을 고찰한다. 심리학사를 전공한 저자는 실험실의 연구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프루스트와 보르헤스의 문학적 비유를 빌려 우리의 기억과 정신, 시간과 인생에 대한 지적 상상력을 간질인다.
그러나 우리는 신기루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둠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려고 불을 켜는 것과 같다.(윌리엄 제임스)
전에도 꼭 같은 상황을 경험한 것 같은 데자뷔 현상은 왜 일어날까?
섬뜩하기조차 한 그 선재()의 느낌은 전생()의 기억이 현실의 경험 속에서 공명을 일으키는 것인가. 아니면 전생의 기억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지 옛날에 우리 머릿속에 존재했던 것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 것인가.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꿈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낮의 잔류물이 꿈속에 나타나 살짝 스치고 지나간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거꾸로 뒤집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은 빨리 간다?
시간의 길이와 속도는 기억 속에서 만들어진다. 시간 감각의 핵심에는 기억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은 우리의 기억을 반주 삼아 우리 내부의 시계에 맞춰 똑딱거리며 사라져간다.
우리는 20세를 전후해 약 10년간에 일어난 일들을 가장 많이 기억한다. 기억의 양이 볼록 솟아난다. 이 시기에 를 처음 만났을 때 를 처음 했을 때와 같은 시간의 표지가 몰려있기 때문이다.
기억을 많이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시기는 당연히 길게 느껴질 것이다. 중년 이후에는 시간의 표지가 줄어들고 기억에 빈틈이 생기면서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회상효과)
한번 보기만 해도 모든 것을 기억해내는 절대적 기억력. 그것은 과연 축복일까?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불면증 환자들이 일시적이나마 절대적 기억력이라는 저주를 견디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무기력하게 잠을 기다리는 동안 너무도 생생하고 뚜렷한 기억의 폭군으로부터 가위눌림을 당한다. 기억이 불러내는 과거에 못 박힌다.
어제 본 나무나 사람의 얼굴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억한다면, 오늘 그 나무와 그 사람은 전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몇 년, 몇 십 년 뒤에 보는 것처럼. 절대적 기억의 소유자에게는 모든 것이 순간마다 새롭다. 그들은 기억이 전혀 없는 사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