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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현대미술 거장과의 만남

Posted March. 01, 2006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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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를 훤히 드러낸 단발머리에 큰 눈을 가진 매력적인 여인.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의 흐릿한 윤곽은 마치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은 사진처럼 보인다.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74)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제2전시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보이는 리츠 케르텔게 초상(6570cm1966)이란 작품이다. 그런데 가까이 살펴보니 그림이다. 작가는 사진 같은 그림을 통해 가공된 이미지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예술에 있어 진정성의 문제를 깊이 사유하게 만든다. 리히터는 이렇게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탐색하면서 역설적으로 전통 장르로서의 회화의 의미를 강조하고 무궁한 가능성을 개척해 왔다.

리히터는 1960년대 이후 세계 현대미술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람들이 회화의 종말을 얘기하는 동안 리히터는 회화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면서 현대적 감각과 방법으로 이를 입증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시장을 둘러보면 사진그림부터 추상과 구상, 개념미술이나 다다이즘의 색채가 드러난 작품까지 양식이 다채로워 이게 모두 한 작가의 작품인가 싶을 정도다. 서구 미술계도 회화의 새 표현방법을 탐구해 온 리히터를 높이 평가한다. 2000년 독일의 미술잡지 아트는 금세기 회화 부문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그를 선정했다.

총 30점이 선보인 이번 전시에선 1960년대부터 2000년 최근작까지 그가 폭넓게 시도한 변화무쌍한 실험들을 볼 수 있다. 대작인 바다 풍경-구름 낀(200200cm1969)도 겉보기엔 대자연의 위대함을 보여 주는 낭만적 그림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그림은 하늘과 바다, 두 장의 사진을 조합해 그려 낸, 한마디로 가공의 세계를 담고 있다. 그림 아래쪽에 일직선으로 가로놓인 인공적 수평선을 통해 미술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허구적인 것에 몰입하게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자신의 팔레트를 그대로 옮겨 놓은 구상 그림이지만 마치 화려한 색채의 추상회화같이 느껴지는 세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뒤 그 위를 회색 물감으로 덮어 버림으로써 그림의 창조와 소멸을 다룬 회색도 있다.

1932년 당시 동독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리히터는 1961년 일찌감치 서독으로 망명해 작품 활동을 해 왔다. 그의 작품은 가격이 비싸기로 유명한데, 작품 양식이 자주 바뀐 데다 동일한 경향의 작품을 많이 제작하지 않아 희소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이번 전시 출품작의 가격만 총 700억 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 전시는 4월 30일까지 열린다. 02-2188-6000

한편 4월 4일까지 서울 관훈동 백송갤러리에서는 리히터의 판화 등을 전시한다.

리히터 외에도 이달 들어 유럽 작가들의 작품전이 잇따르고 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선 리히터전과 동시에 동독 출신 작가 A R 펭크(67)의 작품전이 열린다. 펭크는 독일 신표현주의 미술의 대표주자. 이른바 기호언어로 구성된 그의 작품은 갈등과 대립으로 얼룩진 현대사회에 대한 우화로 읽힌다. 34점의 회화와 조각 3점을 선보였다.

스위스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동 중인 알폰소 휘피(71)의 최신작을 모은 Sentimental Journey 전은 4월 9일까지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 열린다.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 교수를 지낸 휘피는 밝고 산뜻한 색채, 간단명료한 형태의 현대미술 작품을 선보여 왔다. 터키의 약탈과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아르메니아의 성역을 촬영한 뒤 사진 위에 사라진 신화와 전설을 사인펜으로 그려 넣은 마지막 여행 등이 주목된다.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을 돌아다니며 찍은 문() 사진 70여 점과 목재로 만든 문 조형물 등도 선보였다. 02-720-0667

초현실적인 아이디어와 미적 감각이 결합된 프랑스 조각가 부부의 작품전이 220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박여숙 화랑에서 열린다. 클로드 라란(83)과 프랑수아 자비에 라란(80) 부부의 조각작품전. 멧돼지, 숫양, 새 등을 소재로 한 남편 프랑수아 자비에의 작품에는 이집트 미술의 엄숙함이 녹아 있다. 클로드는 나비 의자 등 실용성과 장식성을 결합한 조각작품을 선보인다.



고미석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