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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독 동백림 감형 비밀합의

Posted March. 31, 200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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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외교문서 1206건 11만7000여 쪽이 30일 공개됐다.

외교통상부가 이날 공개한 문서는 동백림(동베를린) 사건과 주한미군 철수론, 요도호() 납북 사건 등을 둘러싼 관련국 간 외교협상 과정을 담고 있다. 일반인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에서 문서를 볼 수 있다.

동백림 사건=1967년 재독() 음악가 윤이상() 씨 등이 동베를린에서 간첩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 정부가 이들을 한국으로 강제 연행한 사건.

공개 문서에 따르면 1969년 1월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 대통령은 파울 프랑크 외무부 제1정치국장을 특사로 한국에 파견해 형 확정자 2명은 15일 이내에 풀어주고 재판 계류 중인 윤 씨 등 4명은 1971년 말까지 석방한다는 비밀 합의를 이끌어냈다.

한국 정부가 서둘러 이에 합의한 것은 불법 연행에 대한 항의 집회가 잇따르는 등 비판 여론이 유럽 내에서 확산됐기 때문.

1968년 8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정부가 자체 행사에 한국 대사를 초청하자 좌익 학생들은 항의 집회를 열었고, 일부 학생은 태극기에 나치 표지를 붙여 게양했다.

1968년 12월 5일에는 40여 명의 독일 학생이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을 석방하라고 외치며 주독 대사관에 난입했다. 대사관 측은 40분간 대사관은 완전히 데모대의 폭력에 맡겨진 상태였다. 기물을 파손하는가 하면 공관 간판에 붉은 페인트칠을 했다고 외무부에 보고했다.

곤경에 빠진 최덕신() 주서독 대사는 1967년 7월 6일 최규하() 외무장관에게 주독 특명전권대사로서 이곳에서 더 복무하는 것이 사태 수습에 도움이 못 된다. 즉시 귀국하도록 하명이 있기를 앙망한다며 사표를 빨리 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주한미군 철수론=1970년대 중반 미국 의회에서 제기된 주한미군 철수론은 당시 미국이 추진하던 중국과의 화해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민주당 원내총무였던 마이크 맨스필드 상원 의원은 1975년 초 작성한 보고서에서 미국의 대()중국 화해정책은 계속 추진돼야 한다며 미국은 서태평양 지역 방위계획에 너무 깊숙이 개입했으며 거액이 소요되는 군사원조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이를 한국과 대만에 대한 미국의 과도한 군사적 개입이 대중() 화해정책에 방해가 되며 막중한 군사비 부담을 초래하기 때문에 미국의 개입 축소를 건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1975년 5월 외무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 의회 일각에서는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 시 미군의 자동 개입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대두하고 있다며 미 하원은 미 2사단을 서울 이남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미 국방부에 제출했다고 보고했다.

요도호 사건=1970년 3월 30일 일본 하네다() 공항을 이륙해 후쿠오카()로 향하던 일본항공(JAL) 요도호를 납치한 적군파 요원들이 김포공항에 착륙한 뒤 79시간을 대치하다 승객들을 풀어주는 대신 야마무라 신지로() 일본 운수성 차관을 인질로 삼아 4월 3일 평양으로 떠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북한이 납치범을 받아들이고 비행기와 승무원들은 일본으로 돌려보내면서 일단락됐다.

일본 정부는 사건이 인명피해 없이 마무리된 데 대해 북한에 감사의 뜻을 표했으나 한국 정부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윤석헌() 당시 외무차관은 주한 일본대사에게 북괴가 비행기의 승객과 기체를 반환한 것은 당연한 일인데 북괴에 감사한다,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유감을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