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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서라도 남으로 가신다더니

Posted April. 07, 2006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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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이헌우 중위)의 사진을 품에 안은 이영희(49여) 씨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영희 씨는 6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위패봉안소로 들어가며 입술을 깨물었다.

반원형 대리석 벽에 깨알같이 새겨진 1만여 명의 이름들. 영희 씨는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눈물 때문인지 아버지의 이름 근처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이름 하나하나를 직접 만지던 그는 중위 이헌우란 이름을 발견하곤 나지막하게 신음하며 주저앉았다.

영희 씨는 함께 탈북하려다 숨진 아버지(사망 당시 75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이 중위는 대학생이던 1951년 1월 간부후보생으로 자원입대했다 같은 해 7월 포로가 됐다. 그는 환갑이 넘도록 이어진 고된 탄광 노동의 후유증으로 뇌중풍(뇌졸중)을 앓다 지난해 8월 숨졌다.

영희 씨는 대신 고향에 가 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지난해 9월 홀로 두만강을 넘었지만 한국행은 고행 길이었다. 탈북을 권유했던 남한 친지들이 이 중위가 숨져 영희 씨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며 연락을 끊었기 때문이다. 영희 씨는 갑자기 복통을 느껴 찾은 중국의 한 병원에서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고 한때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의 도움으로 영희 씨는 지난해 12월 19일 한국에 도착해 1월 11일 국군수도병원에서 자궁근종 제거수술을 받았다.

2월 초 퇴원한 영희 씨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부실한 몸을 이끌고 한식인 이날 국립묘지를 찾았다. 아버지의 위패 앞에서 첫 제사를 올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영희 씨는 아버지께 올릴 과일 몇 개를 사왔다. 하지만 이를 잊어버린 듯 아버지의 이름 앞에서 울음을 감추지 못하며 1시간가량 주저앉아 있었다.

주변 사람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추스른 영희 씨는 몸뚱이는 이곳에 있어도 영혼은 이미 남쪽에 가 있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난다면서 아버지가 고향 땅에 눕지 못해 나는 불효자라고 말했다.

현재 새터민(탈북자) 교육원인 하나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영희 씨는 13일 퇴소할 예정이다. 그는 아버지의 고향인 충남 서천군과 가까운 대전에 거처를 마련했다.

혈혈단신으로 2004년 탈북해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던 국군포로 한만택 씨의 조카 며느리인 심정옥(53) 씨는 영희 씨와 의자매를 맺고 남한 생활을 돕겠다고 나섰다. 영희 씨의 남한 친지들도 13일 대전에 모여 영희 씨에게 용서를 구할 계획이다.

제사를 마치고 하나원으로 돌아가는 영희 씨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는 꿈속에 나타나는 아버지는 아직도 고향 땅을 찾는다면서 아버지의 유해를 모셔오기 전에는 두 다리 펴고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제사에 참석한 최성용 대표는 정부 차원에서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병기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