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핵실험 공언 뒤 6일 만인 9일 핵실험을 감행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핵실험 중단 권고를 무시했으며 국제사회의 설득 노력이 진지하게 진행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또한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도 실현했다.
북한의 노림수=2001년 출범한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강경 일변도의 대북정책에 맞서 체제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핵 보유라는 최종판단에 따라 핵클럽 가입의 마지막 단계인 핵실험을 강행한 것으로 보인다.
5년 동안 핵 동결 해제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폐연료봉 인출 및 재처리핵무기 보유 선언미사일 시험발사 등 위협을 단계적으로 높여 왔음에도 양자() 협상에 응하지 않고 있는 미국을 정면으로 겨냥한 셈이다.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김근식 교수는 핵실험을 해서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은 뒤에 부시 대통령과 담판을 짓겠다는 전략적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북한 외무성은 지난해 3월 31일 성명을 통해 우리가 핵무기 보유국이 된 지금에 와서 6자회담은 마땅히 참가국들이 평등한 자세에서 문제를 푸는 군축회담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핵실험으로 북한이 노리는 것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에 따른 북-미 관계 정상화와 체제의 안전보장, 경제보상의 확보 등이다. 내부적으로는 체제 결속 강화도 노리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노림수가 쉽게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 북한의 의도대로 미국이 북한의 핵실험 카드에 굴복해 북한과의 양자 대화로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기 때문.
북한은 오히려 미국 일본 등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제재와 한국 중국의 교역 및 지원 중단 등의 압박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열쇠는 북한에 대한 최대의 지원국인 중국이 쥐고 있다. 정부 당국자들은 그러나 중국이 북한의 체제가 흔들릴 때까지 밀어붙일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속전속결, 왜 9일?=핵실험 예고 후 일주일도 안 돼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에 대해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미 성명을 발표할 때부터 핵실험 강행 날짜를 정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입을 모았다.
3일 외무성 성명에서 정확한 시점을 언급하지 않은 채 앞으로 핵실험을 할 것이라고 했고 대화와 협상을 통한 조선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려는 원칙적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 대목에 주목해 북한의 핵실험 선언이 미국과의 협상용이자 엄포용이라던 관측은 오판으로 드러났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안보연구실장은 이번 사태의 교훈은 비이성적인 북한을 합리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합리적 기대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국제사회의 설득 노력이 채 진행되기도 전에 핵실험을 전격적으로 감행한 것은 현재의 상황으로는 미국에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해 신속하게 국면전환을 시도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은 지난해 9월 시작된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을 통한 대북금융제재의 고삐를 더욱 강력하게 조여 가고 있다.
북한 외무성은 3일 성명에서 미국의 고립압살 책동이 극한점을 넘어 최악의 상황을 몰고 오고 있는 제반정세 속에서 더는 사태를 수수방관할 수 없게 됐다며 핵실험 강행의 이유를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9일을 핵실험 D데이로 선택한 것은 효과 극대화를 노린 절묘한 택일로 분석하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이날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노동당 총비서로 추대한 지 9돌이 되는 8일과 노동당 창건 61돌이 되는 10일 사이에 있어 핵실험을 경축일 분위기에 맞춰 체제 과시와 주민 결속을 최대화할 수 있는 날로 여긴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 지도부 공감대=핵실험 강행은 김 위원장의 독단이나 북한 군부를 포함한 강경파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라기보다는 북한 지도부 내에서 이뤄진 공감대에 의해 행해진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지난해 2월 외무성의 핵보유 선언 이후 일련의 위기 고조과정이 로드맵(실행계획)에 따라 이뤄졌다는 것. 실제로 3일 핵실험을 천명한 외무성 성명에서도 핵무기 보유 선포는 핵실험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미국의 핵전쟁 위협과 압력 책동은 우리로 하여금 핵 억지력 확보의 필수 공정상의 요구인 핵실험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