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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은 왜 18세기 번영을 잇지 못했나

Posted June. 02, 2007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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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능한 세계 중 최상의 세계.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치히가 18세기를 두고 한 말이다. 세계사에서 18세기가 차지하는 위치는 특별하다. 유럽은 계몽주의와 자연과학의 발달로 새로운 시대를 건설했고 동양은 청-조선-일본 간의 전쟁이 마무리되며 평화의 번영기를 맞이했다. 그야말로 동서양 국가 모두에 최상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가 지난 후 세계의 거대 두 중심축이었던 유럽과 동아시아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맞이했다. 한쪽은 세계를 무대로 식민지를 건설하며 부와 영광을 가져간 반면 다른 한쪽은 그 수탈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대체 18세기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조선, 근대를 꿈꾸다

18세기 조선은 영정조라는 탕평군주 리더 아래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정상적 국정을 가로막던 당파싸움은 잦아들었고 경제적 안정 속에 상공업이 발전했다. 차별받던 서얼들은 특정 당과 연합해 자신들의 정치 투쟁을 벌여 나갔고 문인들은 당색별로 이합집산하며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는 시대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서양과의 조우였다. 청나라를 통해 서양 과학과 철학을 접한 홍대용 박지원 정약용 등 신진 학자들은 앞선 문물을 적극적으로 조선에 도입했다. 서학에 관대한 정조의 암묵적 묵인 하에 천주교가 들어오고 각종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들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군주의 입에서 민국()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민()이 국가의 주요 세력으로 인식됐다.

중국, 안정 속의 풍요

18세기는 중국 역사상 가장 안정된 강건성세(강희제-옹정제-건륭제)의 후반기였다. 몽골, 명의 잔존 세력이 모두 진압되면서 시대는 안정되었고 상공업이 발전하며 인구는 2억 명에서 7억 명으로 급속히 팽창했다. 자명종과 피아노 등을 통해 건륭제의 환심을 산 가톨릭 선교사들은 베이징 체류를 허락받으며 서양 문물을 전파했다. 중화()에 대해 한족뿐 아니라 중국 문물을 잘 이해하고 계승하면 누구나 중화라는 새로운 해석이 나오면서 민족을 넘어선 포용적 사고관이 확산됐다. 실증적 학문인 고증학의 발달이 이뤄진 것도 이때였다.

서양, 동양 콤플렉스에서 벗어남

데카르트, 라이프치히 등의 활약으로 근대과학의 방법론적 토대가 마련되었으며 종교의 테두리를 벗어난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시작됐다. 사상 면에서는 루소를 중심으로 근대 시민의 자각이 시작되면서 인간 이성의 힘을 강조하는 계몽주의가 나타냈다. 카페, 클럽 등이 등장하며 사회적 공론의 장이 마련됐으며 시민사회의 발전은 절대군주의 상징이었던 프랑스 왕의 처형과 공화정을 이뤄냈다. 이러한 근대적 변화와 발전은 유럽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게 했으며 동양에 대해 지녔던 해묵은 콤플렉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했다.

이것만 놓고 보면 18세기는 동서양의 황금시대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결과는 달랐다. 무엇이 원인이 되었을까. 18세기 정신의 실종과 변태적 발달 때문이었다. 18세기 정신은 동서양 모두에 인간 이성의 신뢰와 구체제의 모순으로부터 거듭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와 조선은 모두 보수혁명의 철퇴를 맞았다. 청은 비록 개방된 중화의 모습을 보였으나 내부적으로는 사고전서라는 사상 통폐합을 통해 지배세력인 만주족의 안정을 도모했을 뿐이었다.

조선은 성리학을 세상을 만드는 절대적 원리에서 도구로 완화시키는 데 실패했다. 완벽하게 우주 원리를 설명하는 성리학을 받드는 구체제를 결국 이겨내지 못했다. 청과 조선의 공통점은 절대적 존재(황제와 성리학)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한 18세기의 흐름은 결국 소수 세력으로서 흐지부지 사라졌다. 결국 절대적 존재(기독교와 국왕) 극복에 성공한 유럽과는 반대의 종착지를 향해 내달았다.



유성운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