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 종사자들은 광복 직후만 해도 청부업자로 불렸다. 일제강점기부터 통용되던 이름이었다. 청부는 일정한 기일 내에 완성해야 할 일의 양이나 비용을 미리 정하고 그 일을 맡는 행위라는 뜻이다. 이들은 단순한 도급 업자에 불과했다. 1947년 대한건설협회의 전신인 조선토건협회가 창립됐을 때 138개 회원사는 대부분 영세한 1인 업체였다. 하지만 60년이 흐른 지금 5만5000개 업체에 연간 계약금액 110조 원을 넘는 거대한 건설산업으로 성장했다.
우리 경제발전의 양대 견인차는 수출과 건설이었다. 1965년 태국의 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따내면서 해외로 처음 진출한 건설업계는 1981년에 이르러 수주액 규모에서 미국 다음의 세계 2위로 떠올랐다. 중동 건설 붐은 해외 진출 근로자들의 숱한 사연을 낳았다. 가족과 눈물로 이별하고 사막으로 떠난 아버지들은 자랑스러운 건설 역군이요, 애국자였다. 몇 해 고생해 목돈 장만의 꿈을 이룬 사람이 많았다. 해외 근로자들이 땀 흘려 송금한 달러는 부자 나라를 만드는 데 큰 힘이 됐다.
건설산업은 전쟁의 폐허 위에 고속도로 지하철 항만 주택을 단기간에 만들어 냈다. 국내외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뤄 냈지만 압축 성장의 그늘도 드러냈다. 1994년 성수대교, 이듬해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건설업은 해외 건설에 재도전하면서 위기 탈출에 성공했다.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두바이에서는 삼성건설이 세계 최고층으로 기록될 160층(700m) 빌딩을 짓고 있다. 지난해 해외 수주액은 165억 달러(15조 6000억원)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어제는 건설산업 60년을 기념하는 건설의 날이었다. 지나온 길에 대한 뿌듯한 자부심이 앞선다. 기술과 인력의 질이 중시되는 건설산업은 미래에도 한국인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분야다. 빈손으로 시작해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도전정신과 근면성을 계속 발휘한다면 말이다. 건설인들의 땀에 감사한다.
홍 찬 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