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덕(배용준)을 죽이려는 적들을 피해 기하(문소리)는 기절한 담덕을 데리고 난민촌에 숨어든다. 애틋한 눈빛으로 잠든 담덕을 바라보는 기하. 새벽에 편지를 남기고 떠나고. 잠이 깬 담덕은 가슴 시린 마음으로 편지를 읽는다.
인기리에 방영 중인 MBC 수목 드라마 태왕사신기(극본 송지나연출 김종학)의 한 장면(27일 방영분)이다. 남녀 주인공의 절절한 사랑이 드러나는 대목. 하지만 드라마가 끝나자 이 장면에 대한 시청자들의 논란이 뜨거웠다. 캐스팅 때문이다.
문소리 도회적 이미지 가련한 신녀와 안 어울려
최근 사극 열풍 속에서 시청자들의 캐스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보며 누군 누구와 잘 어울려, 누군 미스 캐스팅이야 등 극중 배역과 배우의 밀착도에 특히 관심을 기울인다.
캐스팅 논란의 중심은 태왕사신기에서 기하 역을 맡은 배우 문소리(33). 극중 문소리는 신화시대 불의 신녀 가진이 환생한 기하다. 어린 시절 기억을 잃고 고구려 국내성 천지신당에 들어가 신녀로 살아가며 고구려 태자 담덕과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는 화천회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물.
상당수 시청자들은 문소리의 도회적 이미지, 개성 강한 외모 등이 신비스럽고 가련한 운명을 지낸 신녀 기하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시청자 조성일 씨는 문소리가 배용준의 이모 같아 집중이 안 된다고 밝혔고, 시청자 강민경 씨도 굳이 여배우가 예뻐야 한다는 생각은 없지만 기하 캐릭터는 문소리 씨 역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시청자들은 연기 잘하는데 왜 외모 가지고만 트집이냐고 반박한다. 이 드라마의 게시판에는 문소리 캐스팅에 대한 글이 1500여 개나 올라와 있다.
SBS 월화 드라마 왕과 나(극본 유동윤연출 김재형)도 마찬가지. 방영 초 20%대 시청률을 기록하며 사극 붐을 주도했지만 8회 방송(18일) 이후 시청률이 10%대로 하락했다. 일부 시청자들은 아역을 거쳐 8회부터 등장한 주인공들의 성인 배역인 오만석(처선), 고주원(성종), 구혜선(소화) 등이 배역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같은 시간대에 방영하는 이산(MBC)의 정조 역 이서진은 방영 전 어색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현재 비교적 잘 어울린다는 평이 많다.
캐스팅 논란 사극에서 왜 유별날까?
사극의 경우 유독 캐스팅 논란이 잦은 편이다. 태조 왕건의 왕건과 해신(이상 KBS)의 장보고 역 최수종, 불멸의 이순신(KBS)의 김명민, 장희빈(KBS)의 김혜수, 주몽(MBC)의 예씨 부인 송지효 등도 방영 초 배역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을 받았다.
문화 평론가들은 사극에서의 캐스팅 논란이 유독 큰 것에 대해 시청자들이 기존 역사 속 이미지와 배우 이미지를 비교하는 데다 사극의 특성이 배우의 개성을 제한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문화평론가 이영미 씨는 현대극의 경우 같은 시나리오라도 배우에 따라 캐릭터가 창조되는, 색다른 측면이 강한데 사극은 왕, 장군 등 역할의 전형성이 강해 배우들이 맡은 배역에서 특유의 개성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영화 속에서 보여 준 문소리의 강력하고 독창적인 개성이 드라마에서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하는 이유다.
TV 드라마의 속성 자체가 사극 미스 캐스팅 논란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영화의 경우 다양한 장르에 어울리는 개성을 지닌 배우들이 주인공을 맡지만 TV 드라마는 대부분 멜로가 중심이다 보니 외모 위주의 선남선녀 배우들로 구성돼 왔다. 이것이 시청자들의 인식을 멜로=선남선녀로 고정시켰다는 것.
제작진은 시청자들이 배역을 지나치게 비주얼적인 측면으로만 판단한다고 말한다. 실제 일부 시청자들은 오만석의 연기보다는 처선(오만석)의 댕기 머리가 어색하다고 비난한다. 김종학 프로덕션 박창식 제작이사는 제작진은 비주얼적인 면과 함께 연기 내공과 경험, 중노동에 가까운 사극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연기의 지속성 등 드라마란 공동 작업 자체를 제대로 해낼 수 있는가를 함께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