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트가 망가졌다. 대부분 골퍼처럼 어느 날 갑자기였다.
구력 13년의 서울대 교육학과 나일주(54사진) 교수는 싱글 골퍼였다. 베스트 스코어는 이븐파 72타. 18홀 동안 퍼터를 26번만 잡은 적도 있다. 지존 신지애의 올 시즌 국내 대회 평균 퍼트 수는 27.59다.
나 교수는 4년 전 원인 모를 퍼트 난조에 빠졌다. 지난해 파5인 곤지암CC 18번홀에서 투 온을 하고도 포 퍼트로 보기를 하자 골프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좋아했던 골프를 포기하긴 쉽지 않았다. 올 초 내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이 잘못된 건 아닐까라는 발상의 전환을 한 뒤 학문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그리고 핑거본(Finger-Bone) 퍼트 그립을 고안했다. 100타를 넘나들었던 스코어도 제자리를 찾았다.
이 그립은 기존의 팜(손바닥) 그립과 달리 미세한 힘 조절이 가능한 손가락뼈를 사용한다. 오른손잡이의 경우 왼손은 평소대로 잡고 오른손만 바꾼다. 검지,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 중간 뼈를 이용할 수 있는데 나 교수는 퍼터 위로 보이는 손가락 수에 따라 각각 노핑거, 원핑거, 투핑거, 스리핑거 그립으로 이름을 붙였다(아래 그래픽 참조). 상황에 따라 또는 각자 편한 그립을 사용하면 된다.
이런 그립을 사용하는 골퍼가 없지는 않았다. 국내 통산 4승을 거둔 박도규의 집게 그립은 노핑거 그립인 셈. 하지만 나 교수는 이 그립의 효용을 물리학, 생체역학, 운동역학적 관점에서 입증하고 체계화시켰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서울대의 협력을 받아 11월 발명 특허를 출원했고 미국 특허 출원을 준비하고 있다. 집필을 마친 논문은 조만간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어깨부터 손끝까지 오각형을 만들어 시계추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까다로운 팜 그립 퍼트와 달리 오른팔만 앞뒤로 움직이면 되는 핑거 그립 퍼트는 동작이 간단해 실수의 가능성이 크게 줄어든다고 나 교수는 설명했다. 감이 아니라 과학을 이용한 방법이라는 것. 세계적인 골퍼들이 퍼트를 잘하는 것은 부단한 노력 덕분이지 기존의 팜 그립은 문제가 많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나 교수는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이 그립은 무엇보다 오른 손목이 따로 놀지 않기 때문에 항상 스위트 스폿에 공을 맞혀 원하는 방향으로 보낼 수 있다. 특허 등록이 되면 퍼트 방법과 용품에 일대 혁신이 일어날 것이라며 프로 선수가 폼을 바꾸기는 쉽지 않겠지만 최경주나 미셸 위가 이 그립을 쓴다면 훨씬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1900년대 초반 모든 골퍼가 야구방망이 잡듯 팜 그립을 사용할 때 해리 바든은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왼손에 올려놓는 오버래핑 그립을 만들었다. 현재 바든 그립은 전 세계 골프장의 페어웨이를 점령하고 있다. 2000년대 그린에서는 팜 그립 대신 나 그립이 유행할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