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개입을 안 하는 걸까, 못하는 걸까.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25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환율 문제를 잘 활용하면 수출 확대의 동력이 될 수 있다며 위기 극복의 근간인 수출 분야를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한다고 밝히자 외환시장 참가자들이 정부의 속내를 읽기 위해 애를 태우고 있다.
윤 장관의 발언은 외환시장 개입을 자제하고 수출을 위해 고()환율을 용인하겠다는 발언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 적극적인 개입으로 환율상승을 막아온 외환당국의 정책이 180도로 변한 것이라는 평가가 가능한 내용이다. 윤 장관의 발언이 전해지자 모처럼 하락세로 출발한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화 매수세가 다시 강해지는 등 시장이 출렁거렸다.
외환시장 참가자들은 윤 장관이 이끄는 2기 경제팀의 외환 정책이 전임 팀과 크게 달라졌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왜 달라졌는지, 달라진 배경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점을 알아야만 환율의 방향을 점칠 수 있기 때문이다.
외환 전문가들이 내놓은 여러 관측 가운데 현재 시장에서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이는 분석은 외환당국이 실익이 없는 시장 개입을 자제하고 당분간 환율 상승의 장점을 역이용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는 설명이다.
발톱 감춘 외환당국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0.30원 내린 1516.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이날 환율은 미국 뉴욕증시 급등으로 전날보다 17.30원 하락한 1499.00원으로 장을 시작했지만 미국 보험사인 AIG의 파산보호 신청설, 동유럽발() 등 국제 금융시장의 악재, 수입업체의 결제수요 증가 등이 고개를 들면서 혼조세로 장을 마쳤다.
한 시중은행 외환딜러는 당국의 움직임에 시장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면서도 당국이 외환보유액 2000억 달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강성 발언을 하다가 고환율을 용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재정부 당국자는 윤 장관의 발언은 고환율의 부정적인 부분만 너무 부각되고 있다는 관점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언급한 것이라며 지나친 쏠림 현상이 있을 때 대응해야 한다는 방침에는 변화가 없다고 설명했다.
한 외환 전문가는 2기 경제팀이 이전과 다른 차별화된 외환정책 포인트를 고민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찔끔찔끔 시장에 개입하기보다는 고점을 찍었다고 판단되는 시점에 대대적인 개입을 해 환율의 고삐를 잡을 가능성이 있어 환투기 세력들이 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달러 상승 나쁜 것만은 아니다
2기 경제팀이 실탄(외환보유액)이 줄었는데도 환율상승에 초조해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경제여건이 2008년과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환율상승이 부작용도 있지만 한국경제에 주는 긍정적인 효과가 커지고 있다.
1기 경제팀은 국제유가가 급등하는 상황에서 경상수지 흑자 전환을 위해 환율상승을 용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물가 부담을 키웠고, 다시 환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외환보유액을 대거 소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현 경제팀은 지난해 10월 이후 3개월 연속 경상수지 흑자를 내는 가운데 출범했다. 외환위기의 가능성도 낮아졌다. 작년에는 시중은행들이 달러 자체를 구하기 어려워 결제위기에 몰렸지만 요즘은 달러 값이 비싸졌지만 달러를 구할 수는 있다. 해외투자가들도 셀 코리아에서 바이 코리아로 돌아서는 징후를 보이고 있다. 고환율은 이런 추세를 앞당길 수 있다.
물가 상승의 주범으로 꼽히던 국제유가도 골칫거리가 아니다. 1기 경제팀이 출범하던 2008년 2월 두바이유 기준 배럴당 90.16달러였지만 올해 2월 평균은 43.12달러로 뚝 떨어졌다. 물가도 6개월 연속 하락해 환율 상승에 따른 수입 물가 상승 부담도 이전보다 덜하다. 오히려 세계경제는 경기 침체로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에 물가와 자산가격의 전반적인 하락)을 우려하고 있다.
정부가 개입하지 않은 고환율은 다른 나라들이 문제 삼기 어려운 수출기업 지원책이기도 하다. 삼성증권의 최고위 관계자는 환율이 정상 범위를 벗어나 가파르게 오르고 있지만 하반기에는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며 세계 각국이 경기 침체 속에서 수출 확대를 고민하고 있는데 환율 상승은 일정 기간 수출기업이 버틸 체력을 마련해주는 부작용 없는 수출기업 지원 정책라고 말했다.
단기간 급등은 놔두지 않을 듯
문제는 환율의 상승 속도다. 환율이 단기 급등하면 금융시장의 불안전성이 커지고 기업들의 리스크도 커질 수 있다. 은행의 자산 건전성이 악화하고 수입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정유 식품업체 등의 환차손이 커지게 된다. 통화옵션파생상품 키코(KIKO), 엔화 대출자들의 손실도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이 때문에 당국은 장기적으로 환율 안정을 위해 국내 달러 조달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총력전을 병행하고 있다. 정부는 올해 외평채 발행 규모를 지난해의 두 배가 넘는 20조6000억 원으로 잡았고, 외평채의 조기발행도 저울질하고 있다.
안순권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 조금 높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외평채 발행에 성공한다면 시중은행이 외화 자금을 조달할 물꼬가 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르면 다음 달부터 정부의 지급보증을 통한 은행의 신규 외화차입이 시작될 가능성도 있다. 이와 함께 정부는 한일 통화스와프 연장 미국 국채를 담보로 하는 달러 조달 해외 투자가 및 교포의 국내 투자 유도 정부투자기관의 대외자산 매각 등을 검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