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사회가 금융위기를 계기로 조세피난처에 전방위적 압력을 가하면서 조세피난처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고 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은행비밀주의를 내세워 국제적 압력을 피해온 조세피난처 국가들이 속속 백기를 들고 있다.
다음 달 2일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는 조세피난처에 대한 강도 높은 규제 방안이 마련될 예정이어서 전 세계 검은돈이 모여들던 조세피난처는 앞으로 더욱 위축될 것으로 전망된다.
설 자리 잃는 은행비밀주의=크리스틴 라가르드 프랑스 경제장관은 18일 의회에 출석해 영국령인 저지 섬 당국과 은행비밀주의 타파 및 조세 관련 정보 교환에 관한 협정서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프랑스는 또 다른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맨 섬 당국과도 비슷한 내용의 협정을 체결할 계획이다. 독일도 최근 맨 섬 당국과 조세 정보를 교환하는 내용의 협정을 맺었다.
앞서 대표적인 조세피난처 국가인 리히텐슈타인과 안도라가 12일 세금 관련 투명성과 정보 교환에 관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을 수용하겠다고 밝혔고, 모나코도 이틀 뒤 은행비밀주의 포기 선언을 했다.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싱가포르, 영국령 버뮤다 등도 은행비밀주의를 포기하거나 완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조세피난처 국가들이 국제사회 압력에 힘없이 무너지는 것은 다음 달 2일 열리는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작성되고 있는 조세피난처 블랙리스트의 위력 때문이다.
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면 국제 금융거래에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는 등 혹독한 제재를 받을 수 있어 협조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고 파이낸셜타임스는 분석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블랙리스트에는 각국 조세 당국에 협조하지 않는 30여 개국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탈세의 온상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명확하게 조세피난처로 분류되지 않았던 스위스도 OECD 리스트에 포함되지 않기 위해 총력전을 펴고 있다. 미셰린 칼미레이 스위스 외무장관은 18일 파리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앞으로는 탈세사건과 관련해 요청이 오면 적극 협력하겠다면서 스위스가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나코 정부도 14일 OECD 기준 수용을 발표하면서 우리의 희망은 OECD의 블랙리스트에서 (국가명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해 리스트를 염두에 둔 결정임을 분명히 했다.
금융위기가 촉발한 전쟁=조세피난처와의 전쟁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되면서 시작됐다.
경기 부양에 막대한 세금을 지출하면서 재정적자 위기에 빠진 각국은 탈세를 돕는 조세피난처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은 개발도상국의 경우 조세피난처로 인한 조세수입 손실분이 연간 1240억 달러에 이른다고 밝히기도 했다.
티머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은 이달 초 의회에서 경제위기 상황에서 세금 누수를 막는 게 중요하다며 기업과 개인들이 (조세피난처를 통해) 부담해야 할 세금을 회피하면서 재정 적자가 더 커지게 됐다고 해외의 조세피난처를 겨냥했다.
이에 따라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조세피난처에 자산을 빼돌리는 모든 미국인을 탈세자로 여기는 법안을 제출했으며 미 상원 일부 의원도 유럽과 카리브해 연안 조세피난처 국가에 무역제재를 가할 것을 요구하는 법안을 제출하며 압박을 가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특히 약 2조 달러의 자금을 운영하는 스위스가 은행비밀주의를 사실상 포기하면서 다른 조세피난처에 미치는 파장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세피난처 국가들의 잇따른 백기 선언에도 불구하고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독일 정부는 리히텐슈타인이나 안도라가 말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라며 우리는 국제금융시스템의 사각지대를 인정할 수 없다고 강도 높은 개혁을 요구했다. 영국 재무부도 성명에서 OECD 기준 수용 결정은 은행비밀주의가 더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증거라면서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유럽에서 은행비밀주의가 무너질 경우 싱가포르 홍콩 두바이 등의 금융 중심지들이 혜택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