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클린턴, 평양 문 노크 9년만에

Posted August. 05, 2009 07:33,   

ENGLISH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4일 방북은 자신의 대통령 재임 말기에 북한 미사일 문제의 해결을 위해 방북을 검토한 지 9년 만에 이뤄졌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해빙무드가 전개되자 당시 북한의 실질적 2인자이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조명록 차수는 그해 10월 미국을 방문해 클린턴 당시 대통령을 만났다. 조명록은 대통령을 예방한 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의 협의를 통해 북-미간 상호 적대시 정책 배제 상호 주권 존중 무력 불사용 내정 불간섭 원칙이 포함된 북-미 공동코뮈니케를 채택했다.

조명록은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클린턴 대통령 방북 초청장을 건넸고, 열흘 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해 북한의 미사일 발사 유예(모라토리엄)를 이끌어내면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사전작업이 본격화됐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그해 11월 방북을 통해 북-미간 수교를 단행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움직임에는 1998년 북한의 대포동1호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 미국 본토 안보에 현실적 위협으로 부상한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를 임기 내에 어떤 식으로든 매듭짓겠다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그의 방북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2000년 11월 실시된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임기 말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클린턴 대통령 스스로도 중동평화 정착과 북한문제 해결이라는 두 가지 현안을 놓고 저울질하다 중동문제에 집중하면서 방북은 없던 일이 됐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을 미국으로 초청하는 안도 제시했으나 이 역시 김 위원장의 불응으로 무산된 것으로 전해진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92년 당선 이후 2001년 퇴임 때까지 제1차 북핵 위기와 한반도 전쟁 위기 등 북한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 시절에 대북정책 기조를 놓고 한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한국과 보조를 맞춰 대북 포용정책을 펴나갔다. 그는 1999년 북한의 핵과 미사일문제를 경제제재 해제와 북-미관계 정상화로 푸는 포괄적 접근법인 페리 프로세스를 대북정책의 틀로 채택하기도 했다. 9년 만에 성사된 방북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미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고 한반도에 평화의 물꼬를 트게 될지 주목된다.



박민혁 mh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