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11 테러로 무너진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WTC) 남쪽 도이체방크 건물에는 우리는 결코 그들을 잊지 못한다는 문구가 들어 있는 대형 성조기가 내걸렸다.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에는 1814년 미영 전쟁 당시 영국군의 포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볼티모어의 매킨리 요새에서 나부끼던 성조기가 전시돼 있다. 프랜시스 스콧 키 변호사가 당시 감격을 적은 시 별이 빛나는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은 미국 국가의 노랫말이 됐다.
국기를 사랑하기로 소문 난 미국인들은 제1차 대전 중 대부분의 주에서 성조기 보호법을 마련했다. 1968년에는 성조기 모독을 처벌하는 연방법도 제정돼 월남전 반대 데모 때 성조기를 불태운 사람이 첫 처벌대상이 됐다. 하지만 1989년 연방대법원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항의 표시로 성조기를 불태운 혐의로 체포된 그레고리 존슨의 행위가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대상이라고 판결했다. 연방의원들이 새로운 성조기 보호법을 통과시켰지만 다시 위헌 판결을 받았다. 성조기를 아끼는 국민 정서와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시민의 권리가 충돌한 예로 볼 수 있다.
광고 전단지에 태극 문양을 그려 넣거나 가게에 홍보 목적으로 대형 태극기를 내거는 등 태극기를 영리 목적으로 사용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의 국무총리 훈령이 시행에 들어갔다. 출판하는 책에 태극기를 그려 넣어 마치 국가 인증을 받은 것처럼 홍보하거나 광고 전단지에 태극 문양을 이용하는 행위도 금지 대상이다. 패스트푸드 업체 등에서 한 번 쓰고 버리는 휴지나 컵 등에 태극 문양을 활용하거나 바닥에 깔고 앉는 방석에 태극기를 그려 넣어서도 안 된다.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와 시민의 손에서 화려하게 재탄생했다. 태극기를 잘라 만든 민소매 티셔츠, 태극기를 접어 만든 치마와 태극기 망토도 등장했다. 신성한 태극기가 생활과 예술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우리의 태극기는 망국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던 대한제국 말기에 태어나 독립운동의 정기와 625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애국혼이 담겨 있다. 굳이 총리 훈령이 아니더라도 태극기에 담긴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박 성 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