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출장을 갈 때 무슨 약을 꼭 사오라며 약 이름을 적은 종이를 건네주는 사람들이 있다. 감기약이나 소화제 아니면 피부질환 연고 따위가 단골 품목이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약이려니 여겨 처음에는 사기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쉽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슈퍼마켓이나 편의점 같은 일반 소매점에서 웬만한 약을 살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약국이 병의원 근처에 몰려 있고 야간에는 문을 닫는 곳이 많아 불편할 때가 많다.
외국에서는 의사 처방전이 필요 없고 안전성이 검증된 의약품에 한해 일반소매점 판매를 허용하는 나라가 많다. 미국은 일반소매점 판매가 가능한 의약품을 OTC(Over The Counter)라고 부른다. 약국의 카운터 밖에서도 팔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스프레이파스나 소독제 같은 일부 처치용 품목만을 소매점에서 취급한다. 감기약이나 소화제 같은 일반 의약품은 물론 박카스조차 판매를 금지하고 있다. 약국의 매출액을 최대한 늘리려는 약사들의 조직적인 반대 탓이 크다. 자격증 소지자들의 파워에 밀려 소비자의 편익이 실종돼 있는 사례다.
일본은 지난해 6월부터 감기약 소화제 비타민 등을 편의점 같은 소매점에서도 팔 수 있도록 했다. 이미 소화제 정장제 등 400개 품목을 일반소매점에서 판매하도록 허용하고 있던 일본은 판매 품목을 대폭 늘렸다. 일반의약품을 3등급으로 나눠 2,3류 의약품에 대해 소매점 판매를 허용하되 등록된 판매자들만 팔 수 있게 했다. 등록판매자는 1년 이상 실무 경력을 갖추고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절충안을 택해 약사들의 반발을 줄인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다하는데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일반의약품을 소매점에서도 살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에 부딪혀 진전이 없다. 작년에 한국개발연구원(KDI) 주최로 열려던 공청회조차 반대에 밀려 무산됐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어제 관훈토론회에서 일자리를 늘리기 위한 서비스업 육성을 강조하면서 일반의약품의 소매점 판매 허용 문제를 사례로 들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생각을 바꾸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교육 의료 같은 서비스업 분야에는 규제만 제거하면 일자리가 크게 늘어날 분야가 많다.
박 영 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