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교포 나상욱(28타이틀리스트)은 1000만 달러의 사나이다. 2004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 데뷔한 뒤 지난달까지 그가 받은 상금은 1025만4294달러(약 121억 원)나 된다.
PGA 투어 프로 골퍼가 1000만 달러를 버는 건 신기한 일이 아니다. 그의 기록이 특별했던 건 한 번의 우승 없이 이만한 상금을 벌었기 때문이다. PGA 투어에서 1승도 없이 1000만 달러 이상을 번 선수는 그를 포함해 3명밖에 없다.
나상욱은 3일 대단하면서도 한편으로 불명예스러운 이 기록을 미련 없이 내려놨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첫 우승을 따낸 것이다. 3일 미국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 서머린TPC(파71)에서 끝난 PGA 투어 가을 시리즈 첫 대회인 저스틴 팀버레이크 슈라이너스 아동병원 오픈 최종 라운드에서 나상욱은 6언더파 65타를 치며 합계 23언더파 261타로 감격적인 첫 우승을 따냈다. 올해 2승을 거둔 장타자 닉 와트니(미국)를 2타 차로 따돌렸다. PGA 투어 211번째 도전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아마 시절 우즈와 동급
나상욱의 첫 우승이 이렇게 늦게 나오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마 시절 그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미국)급 선수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여덟 살이던 1991년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아홉 살 때 처음 골프채를 잡은 뒤 미국 아마추어 무대에서 각종 최연소 기록을 도맡아 썼던 골프 천재였다. 열두 살 때 US주니어골프선수권 대회 본선에 진출하며 미국프로골프(USGA) 주관 대회 사상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웠다. 고교 신입생이던 2001년에는 LA시티챔피언십, 나비스코 주니어 챔피언십, 핑피닉스 챔피언십, 오렌지볼 국제 챔피언십 등을 모조리 휩쓸었다. 2001년 미국 주니어 랭킹 1위도 그의 차지였다.
당시 세계 최고의 골프 인스트럭터로 평가받던 부치 하먼(미국)은 나상욱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하먼이 제자로 들인 아마추어 선수는 우즈와 나상욱 2명밖에 없었다. 나상욱은 스무 살이던 2003년 PGA 퀼리파잉 스쿨을 통과하며 기대에 부응했다.
210전 211기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PGA 투어는 만만치 않았다. 2부 투어와 아시아 투어 등에서는 우승을 맛봤지만 PGA 투어에서는 번번이 우승을 눈앞에서 놓쳤다. 2005년 FRB오픈과 그해 크라이슬러 클래식에서는 연장 끝에 준우승에 머물렀고, 지난해 아놀드 파머 인비테이셔널에서도 준우승했다. 올해 노던트러스트오픈을 포함해 3위도 5번이나 했다.
이날도 와트니의 추격에 끝까지 애를 먹었다. 전반에 2타를 앞섰으나 14번홀에서 보기를 범하며 동타를 허용했다. 하지만 15, 16번홀 연속 버디를 잡아낸 데 이어 17번홀(파3)에서 13m 거리의 버디 퍼트를 성공시키며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이 샷은 PGA투어닷컴이 꼽은 오늘의 샷에 선정됐다.
나상욱은 더블 브레이크가 있는 S자 라인이었다. 이전에도 많이 연습했던 라인이라 자신 있었다. 퍼트를 하는 순간 생각대로 공이 굴러갔고 이 대회는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승 후 인터뷰에서 어젯밤에도 2위로 대회를 마치는 악몽을 꿨다며 그동안 기대했던 우승이 나오지 않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정말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악몽은 이제 그만
나상욱에게는 불명예 기록이 또 하나 있다. 4월 발레로 텍사스 오픈 1라운드 9번 홀에서 기록한 한 홀 최다 타수 기록이다. 나상욱은 이 홀에서 무려 12오버파를 치며 16타 만에 홀 아웃 했다. 이는 PGA 투어가 홀마다 스코어를 집계하기 시작한 1983년 이후 파4홀 최악의 타수다. 최근에는 샷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다는 이유로 한 평론가로부터 거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우승으로 나상욱은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한 방에 날릴 수 있게 됐다. 나상욱은 한 번 우승을 계기로 우승을 자주하게 된 선수를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나도 앞으로 더 자주 우승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