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보이스피싱이야.
5월 초 어느 날 새벽 눈을 비비며 휴대전화를 받은 권순범 이큐브랩 대표(24연세대 전기공학부 3학년 휴학)는 이상한 억양의 목소리를 듣고는 중국에서 걸려 온 사기 전화라고 생각하고 끊었다. 그런데 같은 번호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아 유 메이킹 솔라빈?(Are You Making Solar Bin당신이 태양광 쓰레기통을 만드나요?)
가만히 들어 보니 중동식 영어 발음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바이어가 태양광 쓰레기통을 구매하겠다는 것이었다. 권 대표는 당시 시제품조차 없어 당황스러웠지만 국내 온라인 매체가 우리의 공모전 우승 소식을 영어로 번역해 인터넷에 올리면서 해외 바이어들의 문의가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최근 태양광 쓰레기통 12개를 개당 300만 원에 사우디아라비아 회사에 팔아 36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벤처 설립 이후 첫 매출을 수출로 벌어들인 것이다.
신촌 쓰레기통에서 얻은 아이디어
지난해 3월 이큐브랩을 설립한 창업자 4명은 2009년 사회적 기업에 경영을 조언해 주는 봉사단체인 소셜컨설팅그룹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만났다. 평소 창업을 꿈꾸던 이들은 태양광 쓰레기통을 만들어 보자는 권 대표의 제안에 의기투합했다.
서울 신촌에서 자취를 하던 권 대표는 매일 아침 집 주변 유흥가 쓰레기통에서 쓰레기가 넘치는 것을 보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집에서 쓰레기가 넘치면 손이나 발로 눌러 압축하는데 거리의 쓰레기통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자동으로 압축하는 기능이 있는 쓰레기통에 태양광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정보기술(IT)을 이용해 쓰레기가 넘칠 때 담당 구청에 알려 주면 청소차가 필요할 때만 수거에 나서 인력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권 대표는 손으로 대강 그린 그림 수준의 설계도를 들고 청계천 주변 철물점을 돌며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대부분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청계천 찍고 남양주까지
창업자 4명은 50만 원씩 출자해 허름한 사무실을 마련한 뒤 공장들을 찾아다녔다. 경기 구리시와 남양주시, 서울 금천구 구로동 일대 철물 가공 공장을 돌면서 기술자들을 만나 묻고 배웠다. 창업 멤버인 권형석 생산부문 팀장(25연세대 경영학과 4학년 휴학)은 현장에서 배우며 기본 설계도면을 만드는 데 1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태양광 모듈을 구해 연결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신재생에너지 박람회를 무조건 찾아갔다. 글로벌 시장에서 태양광 사업을 하는 OCI나 한화그룹 직원을 붙잡고 태양광 모듈을 사고 싶다고 했다. 권 팀장은 돌이켜 보면 당시 국내 태양광 기업들이 파는 제품이 무엇인지도 몰랐다며 기업들이 만들지 않는 30W용 소형 태양광 모듈을 달라고 했으니 황당했을 것이라며 웃었다.
부모들의 반대도 걸림돌이었다. 이승재 생산팀장(25서울대 화공생물공학부 4년 휴학)을 비롯해 창업 멤버가 모두 명문대 출신이다 보니 부모들은 고시에 도전하거나 대기업에 들어가 안정적인 생활을 하길 원했다. 권 팀장은 창업하겠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네 인생의 마지막 비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마음이 무거웠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하지만 권 팀장의 아버지는 이달 초 아들이 만든 제품 29개가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의 캠퍼스에 설치되자 아들 몰래 태양광 쓰레기통을 둘러보고 갔다. 특히 태양광 사업을 하는 한화케미칼이 이들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해 1억 원을 조건 없이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다른 창업자들의 부모도 한번 해봐라라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두드리니 열리더라.
좌충우돌을 거듭하던 이들에게 공모전과 정부의 벤처지원사업은 한줄기 빛이었다. 창업멤버인 이성구 마케팅부문 팀장(27고려대 경영학과 졸업)은 공모전에 나선 것은 상금을 받아 투자하기 위해서였지만 우리의 사업 모델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허점을 보완하는 데도 훌륭한 공부가 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지난해 4월 중소기업청이 주관한 예비기술창업자 육성 사업에 응모해 시제품 제작비로 5200만 원을 지원받는 등 각종 창업경진대회와 정부지원사업에 참여해 모두 2억2600만 원의 투자금을 확보했다.
이큐브랩은 현재 호주와 중동처럼 햇빛이 강해 태양광 전기를 만들기가 쉽고 땅이 넓고 인건비가 비싼 지역을 중심으로 수출을 준비하고 있다. 이 회사에 투자한 벤처캐피털인 쿨리지코너인베스트먼트의 권혁태 사장은 태양광 쓰레기통은 미국 일부 지역에서 매년 100%씩 수요가 늘어나는 등 시장성이 검증됐다며 이큐브랩의 제품은 제조업에 IT기술을 합친 독특한 형태로 해외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권 대표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젊은이들이 오로지 대기업 입사나 공무원이 목표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정말 원하는 건지, 주변의 시선 때문인지. 저희는 아무런 경험이 없었지만 정말 원하는 일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말이 실감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