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왕국 일본의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졌다. 세계 TV 시장 1,2위는 삼성과 LG가 차지하고 있다. 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도 일본 기업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소니 파나소닉 샤프와 같은 일본 주요 가전회사의 영업이익을 다 합해도 한국의 삼성전자 하나보다 적다. 쌓아둔 현금이 넘쳐나 은행이라는 말까지 들었던 일본 전자회사들이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국제신용평가사인 피치는 소니와 파나소닉의 신용등급을 각각 BB-와 BB로 3단계, 2단계 떨어뜨렸다. 100년 종신 고용의 전통을 깨고 대규모 감원까지 단행해야 했던 샤프는 8월에 B-로 6단계 신용등급이 강등됐다. 세계 시장에서 돈을 쓸어 담던 일본의 간판 전자회사들이 줄줄이 투자부적격 기업으로 전락한 것이다. 세 회사는 올해 1만 여 명을 구조조정하며 재기에 나섰으나 신용등급 추락에 따른 자금 조달 악화와 경쟁력 하락으로 앞날을 내다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과거의 성공에 도취된 일본 전자회사의 몰락은 예견된 것이다. 삼성과 LG보다 제품 경쟁력이 떨어져 기초 체력이 약한 상황에서 유럽 재정위기, 엔화 가치 상승,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3재()가 겹치면서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일본 기업은 기업가 정신이 충만했던 창업 1세대가 물러난 뒤 특유의 창조적 에너지가 사라졌다. 과감한 혁신보다 점진적 개선에 주력하며 새로운 디지털 기술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다. 전문 경영인이 이끄는 조직은 보수화, 관료화해 세계 경제의 흐름보다 내수에 집중하며 투자 의사결정과 구조조정의 적기를 흘려보냈다.
시장에 영원한 승자란 없다. 기업지배구조에 정답도 존재하지 않는다. 경영의 교과서로 불리던 일본 기업의 몰락이 주는 교훈이다. 한국 기업은 외환위기 이후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체질을 개선하고 오너와 강력한 전략 스태프 조직으로 구성된 특유의 리더십을 구축해 일본 기업을 따라 잡았다. 장기적 비전, 과감한 투자, 신속한 의사결정과 실행력이 강점이다. 이제는 중국 인도와 같은 신흥시장 기업은 물론이고 일본과 서구기업들이 한국식 경영 스타일을 배우고 있다.
한국 대기업은 빠른 추격자에서 시장 창조자로 도약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경제 민주화와 대기업 때리기에 발이 묶였다.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나 총수의 불법 행위를 바로 잡아 시장 질서를 세우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정치권이 반() 기업 정서에 편승해 뿔을 고치려다 소를 잡는 일은 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