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어제 제94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다며 일본의 적극적인 변화와 책임 있는 행동을 촉구했다. 박 대통령은 일본이 우리의 동반자가 되려면 역사를 직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그럴 때 비로소 양국간의 신뢰와 화해, 협력도 가능하다는 언급도 했다.
31절 기념식은 역대 대통령의 취임 후 첫 국가 공식행사여서 국내외의 관심을 끌었다. 박 대통령은 이번 기념식에서 역대 대통령들의 첫 31절 기념사에 비해 매우 강한 어조로 일본의 변화와 책임을 촉구했다. 다만 독도나 군대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데서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첫 31절 기념사에서 일제라는 말을 한 번만 사용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일본의 중국 침략 와중에서라는 구절에서 일본을 한 번 언급했을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는 일본을 언급조차 안했다. 이명박 대통령(MB)은 실용의 자세로 미래지향적 관계를 형성해 나가자.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전직 대통령들이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은 것은 과거보다는 미래에 무게를 두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역대 정부는 예외 없이 임기 초에는 한일관계가 괜찮다가 임기 말에는 악화하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YS는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을 하면서 한일간에 찬 바람이 불었다. DJ는 일본 문화를 개방했지만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진통을 겪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일본과 각박한 외교전쟁도 있을 수 있다는 선전포고식 발언을 했다. MB는 지난해 8월의 독도방문과 일왕 발언으로 한일관계가 최악이 됐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한국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침략의 과거사를 부인한 일본에 책임이 있다. 한일 관계의 개선 노력은 시시포스의 도로(헛수고를 떠올리게 한다.
박 대통령은 아마도 일본에서 천년 대통령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그의 이번 발언이 한일관계에 긍정과 부정, 어떤 쪽으로 영향을 미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한일 간에는 독도, 군대위안부, 역사교과서 등 험난한 지뢰밭이 깔려 있고 일본 지도자의 망언이라는 미사일이 가끔 현해탄을 건너온다. 이달 말경 일본에서 발표하는 역사교과서 검정이 또 한 차례 고비가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분명하고 원칙적인 입장을 밝힌 이상, 말의 무게를 보여줘야 한다. 될 수록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일은 앞으로 자제하고, 전문가와 참모의 의견을 존중하며, 국익과 과거사를 현명하게 분리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일 문제는 차분한 이성보다는 국민정서에 좌우되는 경우도 많고 대통령은 종종 그에 편승하고 싶은 유혹이나 강박에 빠진다. 그 결과는 언제나 실패였음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