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4일 평양 백화원에서 열린 제2차 남북정상회담 환송 오찬 테이블에는 9병의 와인이 올려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나를 집게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참석자들 잔에는 그 와인이 따라졌다. 나를 비롯한 방북 취재단은 숨을 죽였다. 어떤 와인일까….
▷프랑스 부르고뉴 북쪽 코트 드 뉘(Cote-de-Nuits)의 60년 밖에 안 된 신생 와이너리 미셸 피카르(Michel Picard)의 ‘코트 드 뉘 빌라주’ 2002년산. 시가 4만 원 대였다.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장에 오른 보르도 특급 와인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 1993년산과는 급이 달랐다. 그러나 ‘김정일 와인’으로 소개되면서 와이너리의 운명은 바뀌었다. 미국, 일본, 독일 등에 이어 2007년 말엔 한국과도 계약을 맺었다. 프랑스 문화유산 방문 프로그램의 와인 명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셸 피카르가 북한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2년. ‘순백’이란 이름의 파리 북한대사관 직원이 헬기를 타고 찾아와 ‘높으신 분’을 위한 것이라며 출시 제품 15종류를 1박스(12병)씩 구입했고, 이후 1, 2년마다 하위 등급부터 최고급까지 주문해간다고 한다. 수백만 명이 굶어죽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때도 프랑스 와인을 공수해간 것이다. 부전자전일까. 김정은도 5일 대북특사단과의 만찬상에 와인을 올렸다. 그것도 아버지가 ‘간택’한 미셸 피카르의 것으로. 지난해 11월 유럽연합(EU)이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추가 제제로 내놓은 대북 와인 금수령에도 김정은의 식탁은 변화가 없었다.
▷대북특사단 만찬상에는 수삼을 통째로 넣은 수삼 삼로주(蔘露酒·인삼주의 북한식 표현)도 곁들여졌다. 귀빈 접대용으로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1차 정상회담 때엔 백두산 자생 들쭉으로 빚은 들쭉술이, 2차 정상회담 때엔 룡성맥주와 고량주 등이 와인과 함께 올려졌었다. 김정은은 고도비만임에도 꽤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하는데, 술 좋아하는 것도 부전자전인가 보다.
조수진 jin06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