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딸 바보’입니다. 늦은 밤 딸의 학교 앞에서 딸이 자율학습을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음악을 듣습니다. 김민기의 ‘강변에서’는 저 같은 딸 바보 아빠가 부르는 노래죠. 때는 1970년대 초입니다. 새벽부터 ‘새마을 운동’ 노래가 잠을 깨우고, 엉성한 슬레이트 지붕들이 늘어가고, 하면 된다고 믿거나 믿기를 강요당하고, 애국가가 울리면 걸음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던 그런 시절이죠.
해가 저물면 동네는 아이들을 부르는 엄마들의 고함 소리, 두부 장수의 딸랑딸랑 종소리, 라디오 드라마와 뉴스 소리로 시끌벅적합니다. 아빠는 ‘강변에서’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온다. 바람은 어두워가고, 별들은 춤추는데, 건너 공장에 나간 순이는 왜 안 돌아오는 걸까?”
강둑에 쭈그리고 앉아서 딸을 기다리는 아빠는 걱정입니다. 학교도 못 다니고,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열여섯 어린 딸의 모습이 아직도 안 보이니까요. 워낙 흉흉한 세상이니까요. 철교 위로 기차가 지나가니 강 위에 비친 불빛도, 작은 나룻배도 아빠의 마음처럼 출렁거립니다. 별빛도 불안하게 출렁이죠. 그때 강 건너 저 멀리 갈대들 사이로 지친 순이의 모습이 보입니다. 저희 착하고 예쁜 딸의 모습도 보입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터벅터벅 교문을 빠져나옵니다. 안쓰럽고 대견해서 어깨를 다독여주며 가방을 들어주려는데 갑자기 가만 놔두라며 짜증을 냅니다. 무엇을 먹겠냐는 질문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게 웅얼거립니다. 피곤하니까 청소년기의 특징인 자아중심성(egocentrism)이 더 강해진 것이죠. 청소년들은 자신 내면의 세계와 보편적인 세계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의 상태에 따라 세상의 기준을 바꾸곤 하죠.
아이는 보통 때에는 이렇게 무례하지 않습니다. 시험 기간이라 힘드니까 아빠가 자신을 대할 때 지켜야 하는 규칙을 자기도 모르게 바꾸고, 제가 그것을 알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죠. 사실 이런 고무줄 같은 자기중심적인 규칙의 변화는 어른들 사이에서도 흔합니다. 힘들면 아이가 되곤 하죠.
엉겁결에 한 방 맞은 저는 잠시 당황하다가, 다시 다정한 표정을 되찾고 말없이 아이의 이야기를 기다리기로 합니다. 불안정해진 아이에게는 ①혼내지 않고 보호해 주는 안전감을 주는 대상 ②판단하지 않는 태도로 자신의 상태와 생각에 호기심을 가져 주는 대상 ③자신의 상태와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대상 ④도움을 청할 때 적절한 도움을 주고 의논을 해주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니까 아이는 투덜거리며 짜증이 났던 이유를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부모가 아이와 수용적이며 따뜻한 관계를 유지해서,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는 청소년은 자아중심성이 낮은 반면, 지나친 통제와 구속을 받고 있다고 여기는 아이들은 자아중심성이 높습니다. 억울한 것이죠. 공장에서 일하지 않아도 열여섯 살 아들딸들은 여전히 힘들고 부모도 걱정이 많죠. 하지만 부모가 가르치기보다는 이해하려, 인정해 주려 노력한다면 아이들은 부모에게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저절로 발전하고 스스로를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죠.
궁금합니다. 순이도 아빠에게 짜증을 냈을까요? 가끔은 그랬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