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말처럼, 똑같은 기차 사고를 당해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견뎌내고 살아남는 사람이 있다. 예술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트라우마에 무너지는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예술가가 있다.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는 후자에 해당한다.
여섯 살 때는 소아마비에 걸리고 열여덟 살 때는 척추와 골반이 부서지는 엄청난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말년에는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화가. 그가 남긴 그림 중 3분의 1 이상이 자화상인 것은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서였다. 서른 번이 넘는 수술, 여러 차례의 유산, 그것들로 인한 후유증.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삶이었다. 그런데 보통 사람 같았으면 벌써 무너졌겠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화살에 맞은 사슴’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은유적으로 암시하듯, 그는 삶의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상처와 고통에 굴복하지 않고 존엄을 지켰다. 사슴(화가)의 형형한 눈빛이 그 증거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로 죽기 직전에 그린 마지막 그림 ‘비바 라 비다’는 더 그렇다. 온전한 것에서부터 잘게 자른 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수박을 그린 정물화는 그가 살아온 암울한 삶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환기한다. 목마른 사람은 여기로 오라.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화가는 수박을 내어놓으며 삶에 대한 우리의 목마름을 달래준다. 그의 주변에 어른거렸을 죽음의 그림자는 흔적도 없고 목마른 자에게 건네는 환대의 몸짓만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하단 중앙에 배치된 수박의 붉은 속살에는 ‘비바 라 비다’ 즉, ‘삶이여 만세’라고 쓰여 있다.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화가에게 삶을 환대하는 수박을 그리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원주민의 피가 살짝 흐르는 화가로서 느끼는 멕시코에 대한 사랑, 혁명과 미래에 대한 응원이었을까. 그것이 무엇이었든 그에게는 상처와 고통을 응시하고 밀어내면서 생명을 예찬하는, 니체가 말한 ‘힘의 의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