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오아시스랄까, 민주의 유토피아랄까. 깊고 먼 북만의 오운(烏雲)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하였던 이상적 동포촌락이 건설되어 현재 65호 390여 명 동포가 바야흐로 단꿈에 잠겨 아름다운 장래를 엿보고 있다 한다.…헤매고 있는 내외지의 불쌍한 동포들은 다 같이 와서 살기를 희망한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3년 11월 10일자 5면)
일제강점기 본보가 ‘동포의 손 기다리는 무제한의 적농지(適農地·농사에 적합한 땅)’라고 소개하며 이주를 장려했던 북만주 독립운동기지 ‘배달촌’의 정확한 위치와 현재 모습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마을이 세워진 지 100여 년 만이다.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는 학술조사단으로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지난해 9월 배달촌 현지를 방문해 조사했다고 23일 밝혔다. 현지 조사를 벌인 박민영 독립운동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배달촌은 이상설(1870∼1917)과 조성환(1875∼1948) 등이 독립운동을 벌이고자 조성한 한인촌”이라며 “하얼빈에서도 동북방으로 700km나 떨어진 중-러 국경 흑룡강변 오지에 있어서 그 중요성에 비해 덜 조명 받은 대표적 독립운동 근거지”라고 설명했다.
박 연구위원에 따르면 배달촌은 북간도 용정과 서간도 삼원포, 북만주 밀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립운동 기지였다. 만주, 연해주 한인마을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던 마을이기도 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이춘(伊春)시 자인(嘉蔭)현 우윈전(烏云鎭) 일대에 있었다.
배달촌은 첫 건설 이후 2번이나 마을을 옮겨야 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동포 100여 호가 1916년 3월경 오랍간(烏拉幹·올라까하)으로 이주해 황무지를 논으로 일구고 학교를 세우며 시작했다. 1920년 대한독립군 총재대리 김혁(金爀)이 1921년 임정 국무총리 신규식에게 보낸 편지에선 “한인농호 이백여가(韓人農戶 二百餘家)인데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졸업사관이 200여 명”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이곳은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군단 혈성단의 근거지였다. 혈성단장 김국초(金國礎)는 1920년 11월 28일 소재지를 ‘오운현 배달툰(倍達屯)’이라 명기했다. 안타깝게도 이 당시 마을의 오늘날 위치는 이번 조사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배달촌은 1921년 1월 마적 떼의 습격을 받은 뒤 오운(烏雲)현으로 옮겨 다시 건설됐다. ‘배달촌’이라고 명명된 건 이 즈음. 1922년 배달촌에 1년 가까이 머무른 이우석은 “마적은 200여 명이고 우리 학생은 30명인데 마적과 10여 일을 싸웠다”고 들은 얘기를 기록했다. 박 연구위원은 “위치는 오늘날 우윈전 아래 구성촌(舊城村) 서쪽 1km 외곽”이라며 “지금은 중국인 묘지가 있을 뿐 한인이 살았던 흔적은 참담할 정도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현지 풍경을 전했다.
배달촌은 1928년 여름 흑룡강이 범람한 대홍수로 가옥과 전답을 잃은 뒤 다시 한번 ‘오운역 동남쪽’(현재 우윈전 동남쪽 시가지 외곽)으로 옮겼다. 동아일보는 “뿐만 아니라 1931년 9월 18일 사변은 그들로 하여금 다시 죽음의 와중에 헤매게 했다”라고 일제가 일으킨 만주사변이 동포들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전했다. 1933년 본보가 소개한 배달촌은 바로 이곳이다. 시가가 배달촌이었던 재중 동포 유옥자 씨(77)는 연구소 조사에서 “원래 80여 호에 달하는 한인 마을이었으나 광복 뒤 차츰 흩어져 1970년대에는 모두 떠났고 중국인들이 들어와 살았다”고 전했다.
박 연구위원은 “임정 신문인 독립신문은 배달촌의 한인학교 건립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며 “배달촌에서 생겨난 실업회 농민회 등도 독립운동의 방편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종엽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