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조나-LA 다저스의 2019 메이저리그 개막전이 열린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 다저스의 1회초 수비 때 선발 마운드에 선 이는 등번호 22번의 에이스 클레이턴 커쇼가 아니었다. 개막전 첫 공을 던진 선수는 등번호 99번의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32)이었다. 그의 손을 떠난 첫 공은 선두 타자 애덤 존스의 바깥쪽 낮은 코스로 절묘하게 빨려 들어가며 스트라이크가 됐다. 이렇게 ‘괴물 투수’ 류현진의 또 하나의 신화가 시작됐다.
류현진이 2001년 박찬호(당시 다저스)에 이어 18년 만에 한국인 빅리거 메이저리그 개막전 승리 투수가 됐다. 류현진은 이날 애리조나를 상대로 6이닝 4안타(1홈런 포함) 1실점으로 호투하며 팀의 12-5, 대승을 이끌었다. 볼넷은 하나도 내주지 않았고, 삼진은 8개나 잡아냈다. 투구 수 82개 중 스트라이크는 59개였다. 류현진은 7-1로 넉넉하게 앞선 6회말 타석에서 대타로 교체됐다.
모든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 ‘에이스’급 피칭이었다. 메이저리그 투수 최고 몸값을 자랑하는 잭 그링키와의 선발 맞대결에서도 완승을 거뒀다. 그링키는 3과 3분의 2이닝 동안 4홈런을 포함해 7안타 7실점으로 무너졌다.
전날까지만 해도 개막전 선발 류현진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다. 일부 언론은 그를 ‘플랜D’라고 표현했다. 1∼3선발이었던 커쇼-워커 뷸러-리치 힐이 모두 부상 등의 이유로 출전하지 못하는 바람에 개막전 선발 자리를 차지했다는 의미였다. 야후스포츠는 30개 팀 개막전 선발 투수 랭킹을 매기면서 류현진을 19위로 평가했다.
하지만 류현진은 이날 ‘빅게임 피처’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류현진은 1회 선두타자 존스와 8구까지 가는 긴 승부 끝에 몸쪽 커터(시속 140km)로 헛스윙 삼진을 잡았다. 볼카운트가 3볼 1스트라이크로 몰린 상황에서 이끌어낸 귀중한 아웃카운트였다.
이후부터 그의 투구에는 거칠 게 없었다. 포심 패스트볼, 커터, 커브, 체인지업을 고루 사용하며 스트라이크존 상하좌우를 골고루 공략했다. 1회 1사 1루에서 윌머 플로렌스와 데이비드 페랄타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내며 1회 3개의 아웃카운트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냈다. 플로렌스를 시작으로 5회 2사 후 닉 아메드에게 2루타를 허용할 때까지 무려 13타자를 연속 범타 처리했다.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다 6회초 선두 타자 존스에게 커브를 던지다 좌월 홈런을 허용한 게 옥에 티였다.
경기 후 미국 언론의 태도도 180도 바뀌었다. 메이저리그 공 홈페이지 MLB.com은 “커쇼와 샌디 쿠팩스 앞에서 류현진이 개막전을 지배해온 다저스 좌완의 전통을 이어갔다”고 극찬했다. 쿠팩스는 다저스는 물론 메이저리그를 통틀어서도 최고의 왼손으로 평가받는다. 커쇼는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8년 연속 개막전 선발로 등판했다.
다저스 타선도 역대 메이저리그 개막전 최다인 8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류현진의 어깨를 가볍게 했다. 한 경기 8홈런은 2002년 5월 24일 밀워키를 상대로 다저스가 세운 한 경기 최다 홈런 타이 기록이기도 하다. 1회말 족 피더슨의 3점 홈런을 시작으로 다저스 타선은 연속해서 불을 뿜었다. 피더슨과 엔리케 에르난데스가 홈런을 2개씩 쳤고, 오스틴 반스, 코리 시거, 맥스 먼시, 코디 벨린저 등이 개막 축포를 날렸다.
류현진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개막전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었다. 캠프 시작 후 몸 상태가 좋아 내 몸을 믿고 던졌다. 타자들이 초반부터 시원하게 점수를 지원해줘서 편하게 던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01년 박찬호와의 비교를 묻는 질문에는 웃음을 지으며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 잘 마쳤기 때문에 다음 게임을 잘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은 “류현진의 심장박동은 일정했다. 어떤 부담감이나 긴장도 느끼지 않고 타자들을 상대했다”고 평가했다.
류현진은 내달 3일 샌프란시스코와의 안방경기에 등판할 예정이다. 상대 선발은 샌프란시스코 왼손 에이스 매디슨 범가너(30)다. 29일 샌디에이고와의 개막전에 선발 등판한 범가너는 7이닝 5안타 9삼진 2실점으로 잘 던졌지만 팀이 0-2로 패해 패전투수가 됐다.
이헌재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