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직후부터 ‘한반도 운전석’에 앉겠다던 문재인 대통령이 하노이 결렬 이후 본격화된 북-미 정상 간의 거센 힘겨루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그야말로 ‘북핵 샌드위치’다. 미국 워싱턴으로 직접 날아가 제안한 ‘굿 이너프 딜’(북-미가 수용할 만한 충분히 좋은 합의)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면전에서 거절한 데 이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부터는 “중재자, 촉진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돼라”며 남북 경협 추진을 재촉 받았기 때문이다. 청와대 안팎에서도 “비핵화 대화 추진 이후 가장 어려운 상황”이라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김 위원장은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문 대통령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며 “실천적 행동으로 그 진심을 보여주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북-미 중재보다는 지난해 9월 평양에서 합의한 9·19 평양공동선언의 후속 조치와 본격적인 남북 경협에 나서라고 촉구한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9·19 선언에 담긴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해 한미 정상회담에서 “적기가 아니다”며 일축했다. 그러면서 “대북제재는 지금 적정한 수준이며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한 뒤 “현 시점에서는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빅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초기 수준의 남북 경협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지렛대 삼아 북한을 설득하려던 문 대통령의 구상을 거절한 것이다.
워싱턴과 평양이 문 대통령에게 잇달아 불만을 표출한 데 대해 청와대는 공식 반응을 자제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동의한 만큼 4차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돌파구를 연다는 계획이지만, 정작 문 대통령에겐 김 위원장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낼 마땅한 카드가 없다. 남북 정상회담마저 소득 없이 끝날 경우 하노이와 워싱턴에 이어 초유의 ‘3연속 노딜’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나마 북-미 정상 모두 대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점에 문 대통령은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다. 김 위원장은 “(대북)제재 해제 문제 때문에 목말라(목매어) 미국과의 수뇌회담에 집착할 필요 없다”면서도 “3차 조미(북-미) 수뇌회담을 한 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도 트위터에서 “3차 회담이 좋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고 화답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곧 대북 특별사절단을 파견하는 방안을 북측과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15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평가와 4차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입장을 밝힐 계획이다.
한상준 always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