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 30일 오전 9시 일본 도쿄역. 궂은 날씨에도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시민으로 붐볐다. 1989년부터 30년간 지속된 헤이세이(平成) 시대의 마지막 날을 맞아 아키히토(明仁) 일왕 거처를 배경으로 한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시민 대부분은 도쿄역 서쪽 문으로 나와 일왕이 사는 고쿄(皇居)로 향했다.
오전 9시 40분경 나루히토(德仁) 왕세자를 태운 검은색 승용차가 고쿄로 향하자 시민들은 일제히 “와∼” 하는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나루히토 왕세자도 창문을 내려 손을 흔들어 답했다.
공영방송 NHK는 이날 하루 종일 헤이세이 특집을 내보냈다. 중간중간 아나운서가 ‘헤이세이의 남은 시간’을 분 단위로 알렸다. 저녁엔 도쿄 중심가 시부야에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 새 시대를 여는 카운트다운을 외쳤다. “3, 2, 1, 오메데토 레이와(축하해 레이와)∼.”
시민들의 들뜬 분위기와 달리 고쿄에서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아키히토 일왕의 퇴위식이 진행됐다. 아키히토 일왕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고쿄 내 3개 신전을 참배하며 자신의 퇴위를 알렸다. 나루히토 왕세자, 나머지 왕족들도 차례대로 참배했다.
정식 퇴위식은 오후 5시 고쿄 궁전 안에 있는 영빈관 마쓰노마(松の間)에서 열렸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포함한 각료, 지방자치단체장 등도 300여 명 참석했다. 아베 총리는 국민을 대표해 감사 인사를 했다. 아키히토 일왕도 자신의 퇴위 메시지를 읽으며 마지막 공무를 끝냈다. 그는 1일부터 일왕에서 물러나 상왕(上皇·조코)이 됐다. 도쿄 아카사카(赤坂)에 있는 왕족 거주 지역이 그의 새 거처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1일 0시를 기점으로 제126대 일왕으로 즉위했다. 정부 일각에서 “0시에 맞춰 즉위식을 거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국민 편의를 위해 행사를 1일 오전 10시 30분으로 늦췄다. 첫 행사는 마쓰노마에서 열리는 3종 신기(神器) 계승식이다. 거울, 검, 굽은 구슬로 왕실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세 가지 보물을 뜻한다. 이 의식에는 왕가의 성년 남자만 참석할 수 있고, 여성 왕족은 배제돼 논란이 일기도 한다.
나루히토 새 일왕은 이어 오전 11시 10분부터 10분 남짓 같은 장소에서 ‘조현(朝見)식’에 참여한다. 새롭게 즉위한 일왕이 총리를 비롯한 각료와 광역단체장 등을 처음 만나는 행사다. 이 자리에서 새 일왕은 즉위 후 첫 소감을 밝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9일(현지 시간) 아키히토 일왕이 동서 냉전 말기부터 자신을 포함한 미국 대통령 5명을 일본에 초대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고 미일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인을 대표해 나와 아내(멜라니아 여사)는 아키히토 일왕과 미치코(美智子) 왕비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뜻을 전한다”며 “헤이세이 시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즉위를 준비하는 시점에 미국과 일본의 긴밀한 관계가 갖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싶다”고 했다.
한편 일본 언론들은 30일 “아키히토 일왕의 유일한 손자인 히사히토(悠仁·13) 왕자의 교실 책상에서 흉기가 발견된 사건과 관련해 경찰이 용의자인 50대 남성 1명을 체포했다”고 전했다. 경찰은 지난달 26일 히사히토 왕자의 교실 책상에서 흉기 2개가 발견됐다는 학교 측의 신고를 받고 수사 중이었다. 일본 경찰은 이번 일왕의 퇴위, 즉위를 전후해 일왕제에 반대하는 이들의 테러에 대한 경계를 강화해 왔다.
도쿄=박형준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