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0년 5월 30일 독일을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고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는 기초를 놓은 프리드리히 2세가 국왕에 즉위했다. 그해 10월 오스트리아에서는 카를 6세가 사망하고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했다. 같은 해 12월 프리드리히는 전격적으로 오스트리아 슐레지엔을 침공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전쟁이자, 7년 전쟁, 그 다음 세대의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까지 이어지는 세계 대전의 시작이었다.
왕자 시절 프리드리히는 군사훈련을 혐오하고, 학문과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던 진보적인 왕이었다. 그래서 그가 즉위하자마자 벌인 행동이 침략 전쟁이라는 사실에 유럽은 놀랐다. 그러나 이 놀라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침공 다음에 벌어지는 7년 전쟁에서 이 ‘문학청년’은 놀라운 전술과 군사적 안목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다. 대왕이 사망한 후 프랑스의 군사 천재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정복하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묘를 방문했다. 그의 시신 앞에서 나폴레옹은 따라온 부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군들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게. 이분이 살아계셨으면 우린 여기에 오지도 못했어.”
프리드리히의 군사적 역량은 총성 없는 전쟁, 외교에서도 탁월했다. 슐레지엔을 향해 나아갈 때 그는 프랑스와 사전 교감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분명히 프로이센과 보조를 같이할 것이라 판단하고 프랑스 왕의 사절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린 당신들을 위해 싸우러 가는 거요.” 그의 예측대로 프랑스는 참전했다. 프리드리히는 이권이라는 입장에서 외교를 보았고, 먼저 카드를 탈취한 뒤에 상대국이 보일 반응을 예측하고 행동했다. 이런 자세가 그를 ‘근세 독일의 대왕’으로 만들었다.
최근 러시아에 대한 북한의 구애가 좌절로 끝남을 봤다. 북한이 러시아에 줄 이익이 아무것도 없다. 있다고 해도 그로 인한 손실을 보충하지 못한다. 베트남에서의 미국과의 외교 실패에 이은 또 다른 참사다. 북한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외교를 참고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