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김대업을 ‘義人’으로 치켜세웠나
Posted July. 09, 2019 07:40,
Updated July. 09, 2019 07:40
누가 김대업을 ‘義人’으로 치켜세웠나.
July. 09, 2019 07:40.
by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믿기지 않았다. 지난달 30일 필리핀에서 체포된 김대업(58)은 17년 전 기세등등하던 김대업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멍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표정은 초췌한 노인 그 자체였다. 김대업은 사기 혐의로 시한부 기소 중지된 상태에서 3년 전 필리핀으로 도망쳤다가 인터폴에 수배됐었다.
벌써 많은 사람의 기억에선 잊혀졌겠지만 김대업은 2002년 대선의 핵심 변수였다. 그해 7월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 문제와 관련해 “병적기록표도 위·변조됐다” “병역 비리 은폐 대책회의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정국은 ‘병풍(兵風)’으로 요동쳤다.
그해 6월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이회창 대세론에 위협을 느낀 민주당은 김대업발 병풍에 명운을 걸었다. 추미애는 “용감한 시민”이라고 했고, 박양수는 “병역 비리만은 발본색원해야겠다는 신념을 가진 의인(義人)이다”라고 띄우기에 바빴다. 이해찬은 “그쪽(검찰)이 국회 대정부질문을 통해 병역 의혹을 제기해 달라고 했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병풍 유도’ 논란을 일으켰다.
검찰은 대선 두 달 전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김대업 주장이 대부분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김대업은 이미 잠적해버렸고, 수사를 지휘한 검찰은 “(범죄) 신고자인 김대업을 사법처리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발을 뺐다. 병풍의 직격탄을 맞은 이회창 후보의 여론조사 지지율은 최대 11.8%나 빠지기도 했다. 날 선 정치권 공방 속에서 병풍의 진실은 사라지고 사람들의 뇌리엔 병역 비리라는 키워드만 남았다. 프레임 공방이 빚어낸 역설이다. 2002년 대선 결과 노무현과 이회창의 득표율 차는 2.3%포인트(57만 표)였다.
물론 선거의 승인과 패인이 한두 가지 변수에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상대 후보의 비리 의혹을 겨냥한 네거티브 캠페인은 정치 현장에서 피할 수 없다. 문제는 의인이 팩트가 아니라 누구 편이냐에 따라 결정됐다는 점이다. 제대로 사실 관계를 따져보지도 않은 공세는 네거티브 캠페인이 아니라 범죄 행위나 다름없다. 그동안 정치권은 그 모호한 경계선에서 네거티브의 칼을 정의의 보검인 양 휘두르지 않았는지 자성해야 한다.
김대업을 의인으로 치켜세운 정치인들은 이후 입을 다물었다. 대부분 “특별히 할 말이 없다”며 모르쇠로 넘어갔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언제든지 제2, 제3의 김대업이 ‘떴다방’처럼 등장할 것이다. 최근 일부 여야 의원이 장자연 사건의 증인으로 거론된 윤지오 비호에 나섰다. 뒤늦게 윤지오의 행적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나는 잘 모르는 일”이라며 슬그머니 발을 빼는 의원들의 모습은 김대업 사건의 비겁했던 장면과 겹쳐 보인다.
김대업은 2008년 1월 연말 사면 대상에서 제외되자 기자들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들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조만간 그들의 이중적인 행동과 실상을 폭로하겠다”고 했다. 이어 “2002년 대선에서 나를 의인으로 불렀던 측근들은 나에게 어떤 말을 했었는지, 어떻게 정권을 잡았는지, 심지어 나에게 어떤 권력의 칼을 휘둘렀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병풍이 권력형 기획 작품일 가능성을 내비쳤는데 당시 측근들은 거의 침묵을 지켰다.
김대업이 필리핀 현지 조사를 마친 뒤 2, 3개월 지나 국내에 들어오면 사기 사건 외에 병풍 사건의 진상도 밝혀봤으면 좋겠다. 김대업이 정말 정의 구현 차원에서 혈혈단신으로 나선 것인지, 당시 권력층과 모종의 끈을 갖고 움직였는지 제대로 가려진다면 제2, 제3의 김대업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 개혁을 멀리서 찾을 게 아니다.
ENGLISH
믿기지 않았다. 지난달 30일 필리핀에서 체포된 김대업(58)은 17년 전 기세등등하던 김대업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멍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표정은 초췌한 노인 그 자체였다. 김대업은 사기 혐의로 시한부 기소 중지된 상태에서 3년 전 필리핀으로 도망쳤다가 인터폴에 수배됐었다.
벌써 많은 사람의 기억에선 잊혀졌겠지만 김대업은 2002년 대선의 핵심 변수였다. 그해 7월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 문제와 관련해 “병적기록표도 위·변조됐다” “병역 비리 은폐 대책회의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정국은 ‘병풍(兵風)’으로 요동쳤다.
그해 6월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이회창 대세론에 위협을 느낀 민주당은 김대업발 병풍에 명운을 걸었다. 추미애는 “용감한 시민”이라고 했고, 박양수는 “병역 비리만은 발본색원해야겠다는 신념을 가진 의인(義人)이다”라고 띄우기에 바빴다. 이해찬은 “그쪽(검찰)이 국회 대정부질문을 통해 병역 의혹을 제기해 달라고 했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병풍 유도’ 논란을 일으켰다.
검찰은 대선 두 달 전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김대업 주장이 대부분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김대업은 이미 잠적해버렸고, 수사를 지휘한 검찰은 “(범죄) 신고자인 김대업을 사법처리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발을 뺐다. 병풍의 직격탄을 맞은 이회창 후보의 여론조사 지지율은 최대 11.8%나 빠지기도 했다. 날 선 정치권 공방 속에서 병풍의 진실은 사라지고 사람들의 뇌리엔 병역 비리라는 키워드만 남았다. 프레임 공방이 빚어낸 역설이다. 2002년 대선 결과 노무현과 이회창의 득표율 차는 2.3%포인트(57만 표)였다.
물론 선거의 승인과 패인이 한두 가지 변수에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상대 후보의 비리 의혹을 겨냥한 네거티브 캠페인은 정치 현장에서 피할 수 없다. 문제는 의인이 팩트가 아니라 누구 편이냐에 따라 결정됐다는 점이다. 제대로 사실 관계를 따져보지도 않은 공세는 네거티브 캠페인이 아니라 범죄 행위나 다름없다. 그동안 정치권은 그 모호한 경계선에서 네거티브의 칼을 정의의 보검인 양 휘두르지 않았는지 자성해야 한다.
김대업을 의인으로 치켜세운 정치인들은 이후 입을 다물었다. 대부분 “특별히 할 말이 없다”며 모르쇠로 넘어갔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언제든지 제2, 제3의 김대업이 ‘떴다방’처럼 등장할 것이다. 최근 일부 여야 의원이 장자연 사건의 증인으로 거론된 윤지오 비호에 나섰다. 뒤늦게 윤지오의 행적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나는 잘 모르는 일”이라며 슬그머니 발을 빼는 의원들의 모습은 김대업 사건의 비겁했던 장면과 겹쳐 보인다.
김대업은 2008년 1월 연말 사면 대상에서 제외되자 기자들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들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조만간 그들의 이중적인 행동과 실상을 폭로하겠다”고 했다. 이어 “2002년 대선에서 나를 의인으로 불렀던 측근들은 나에게 어떤 말을 했었는지, 어떻게 정권을 잡았는지, 심지어 나에게 어떤 권력의 칼을 휘둘렀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병풍이 권력형 기획 작품일 가능성을 내비쳤는데 당시 측근들은 거의 침묵을 지켰다.
김대업이 필리핀 현지 조사를 마친 뒤 2, 3개월 지나 국내에 들어오면 사기 사건 외에 병풍 사건의 진상도 밝혀봤으면 좋겠다. 김대업이 정말 정의 구현 차원에서 혈혈단신으로 나선 것인지, 당시 권력층과 모종의 끈을 갖고 움직였는지 제대로 가려진다면 제2, 제3의 김대업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 개혁을 멀리서 찾을 게 아니다.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Most View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