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사 중에도 명품 브랜드가 있다. 1969년 독일 뮌헨에서 출발한 음반사 ECM은 키스 재럿, 팻 메시니, 얀 가르바레크 등 재즈 거장들의 음반을 독보적 관점에서 제작했다. 아르보 패르트 같은 현대음악가의 작품을 비롯한 클래식, 민속음악까지 아울렀다. 추상화 같은 사진 작품으로 만든 표지로도 이름이 높다.
ECM의 심장이 몇 달간 서울에서 뛴다. 오늘부터 내년 2월 29일까지 현대카드가 서울 용산구 ‘스토리지’에서 여는 ECM 창립 50주년 기념 전시 ‘RE:ECM’ 덕분이다. 개막 하루 전, 이번 전시를 공동 총괄한 한국인 정선 씨(37)를 만났다. 그는 ECM의 음악 프로듀서다. ECM 설립자 만프레트 아이허(76)가 개인 사정으로 방한하지 못한 가운데 그가 ECM을 대표해서 왔다.
“그간 ECM 관련 공식 전시는 뮌헨을 비롯해 중국 상하이, 서울(2013년) 등지에서 몇 차례 열렸지만 이번 같은 전시는 없었습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세계의 작가들이 ECM 음악에서 받은 영감을 새 작품으로 풀어냈어요. 그 과정은 ECM의 음반 제작 태도와 일맥상통합니다.”
지휘자 정명훈 씨의 둘째 아들이기도 한 그는 2012년 ECM에 입사했다. 재즈 기타와 작곡을 전공한 뒤, 재즈 드러머 빌리 하트의 녹음 현장에 구경 갔다가 ECM 설립자 아이허를 만나 일이 풀렸다. 현재 아이허를 제외하면 뮌헨 본사 소속 ECM 음악 프로듀서는 정 씨뿐이다.
“아이허가 얼마 전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나에게 녹음 스튜디오는 곧 사찰이나 교회와 다름없다네. 성전(聖殿)이지.’ 곁에서 지켜본 그에게 있어 음악은 열정을 넘어 아예 존재 이유더군요.”
정 씨는 “만프레트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녹음은 결과물이 판이하다. 그가 연주자들에게 ‘산 위로 부는 바람을 상상하라’는 등의 이야기를 속삭인 뒤에는 연주가 달라진다”며 혀를 내둘렀다.
정 씨의 몫도 늘고 있다. 그가 지난해 프로듀스한 미국 드러머 앤드루 시릴의 앨범 ‘Lebroba’는 뉴욕타임스, 빌보드 등 여러 매체가 극찬했다. 25일 발매하는 영국 건반주자 킷 다운스의 신작도 그가 매만졌다. 정 씨는 “앨범 전체를 하나의 긴 곡처럼 들리도록 사전 제작 단계부터 큰 그림을 그려 봤다”고 했다.
큰 산 같은 부친에게서 그가 받은 유산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부지런함과 솔직함이죠. 아버지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종일 악보를 들여다보죠. ‘일개 지휘자가 왜 그리 거액을 받느냐’는 분들도 있더군요. 하지만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보면 그런 이야기를 안 하실 겁니다. 제가 본 모든 음악가들 중 가장 솔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죠.”
어려서는 정명훈, 사회에 나와서는 만프레트 아이허. 지독한 일중독자인 거장들과 평생 함께한 셈이다. 그는 “커다란 부담이자 대단한 행운”이라고 했다.
“만약 내일부터 제가 블루노트(미국 유명 재즈 음반사)로 출근한다면 결코 같은 방식으로 일할 수 없을 겁니다. ECM만의 녹음 비결은 듣는 사람을 연주자 관점에 놓는 것에서 시작하죠. 한 대의 피아노 연주라도 저음은 왼쪽, 고음은 오른쪽 스피커에 배치하는 식으로요.”
정 씨는 “이번 전시의 가장 특별한 점 역시 ECM의 관점이 아닌, ECM을 사랑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라며 웃었다.
“관객들 역시 바로 그 관점에서 맘껏 즐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임희윤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