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죽음보다 큰 상실의 고통이 있을까. 화가 아실 고르키는 청소년기에 엄마를 잃었다. 부모의 보살핌 대신 가난과 고난 속에서 자란 그는 화가가 된 후에야 엄마를 애도할 수 있었다. 이 그림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과 엄마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왠지 우울해 보인다. 도대체 그의 가족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고르키는 20세기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이끈 주요 화가지만 아르메니아 태생이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겪었던 가족의 비극은 훗날 그의 삶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0년 그가 4세 때 아버지는 군대 징집을 피해 미국으로 떠났다. 5년 후 터키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했을 때 그의 가족은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1919년 엄마가 굶어 죽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낳은 150만 명의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이듬해 고르키는 미국으로 갔고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화가로서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 나갔다.
그가 22세 때 그리기 시작한 이 초상화는 장장 10년에 걸쳐 제작됐다. 8세 때 고향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바탕이 됐지만 사진의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았다. 코트를 입은 어린 아들 옆에는 결연한 표정의 엄마가 앉아 있다. 실제 사진에서 엄마는 화려한 꽃무늬의 앞치마를 입고 있지만 화가는 이를 하얀색으로 대체했고, 색은 칠하다 말았다. “눈을 감고 엄마의 긴 앞치마에 얼굴을 파묻을 때마다 엄마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고르키가 회고하듯, 그에게 앞치마는 엄마와 동일시되는 그리움의 대상이자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을 상징한다. 그러니 색을 다 채울 수 없었던 게다.
화가는 엄마의 양손도 생략해 버렸다. 손은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속한다. 축복을 주고, 언어를 대신하고, 연결과 보호의 역할을 한다. 손이 없다는 건 보살핌의 부재와 단절을 의미한다. 10년을 매달리고도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건 그의 마음속에 자리한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 컸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