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물든 거리에 기쁨의 환호성이 터졌다. “베트남! 보딕(챔피언)!” “박항세오, 생큐(박항서 감독님 감사합니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 소리와 함께 숙원이었던 동남아시아(SEA)경기 남자 축구 우승이 확정된 10일 밤 베트남 전역이 들썩였다. 이 순간을 일간 베트남뉴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60년 만의 꿈을 이룬 온 국민이 황홀감에 빠졌다. 자축의 물결이 일어났다.”
강렬한 ‘디 바오’(베트남 축구팬들의 길거리 세리머니)였다. 온몸에 금성홍기(베트남 국기)를 두른 이들은 오토바이나 자동차에 올라 경적을 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도시를 휩쓸었다. 박항서 감독의 초상화나 태극기를 흔들며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도 있었다. 베트남 언론 징은 “도시 기능이 마비될 정도로 흥겨운 축제가 이어졌다”고 전했다.
‘쌀딩크’ 박항서 감독(60·사진)이 베트남에 또 한 번 진한 감동을 안기며 영웅으로 떠올랐다. 박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22세 이하 대표팀은 이날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SEA경기 남자 축구 결승에서 인도네시아를 3-0으로 완파하고 60년 만에 첫 금메달을 차지했다. 베트남은 대회 원년(1959년)에는 통일 베트남이 아닌 ‘남(南)베트남’으로 출전해 우승한 바 있다.
하노이와 호찌민 등 대도시 곳곳에서는 수천 명이 거리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앞에 모여 거리 응원을 펼쳤다. 하노이를 여행 중인 박진호 씨(33)는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사람만 보면 하이파이브를 했다. ‘박항서, 최고’라고 한국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학교, 병원 등에서도 단체 응원전이 펼쳐질 정도였다. 징은 “국립병원에 입원한 환자들도 TV 앞에 모여 응원을 했다. 그들에게는 대표팀 축구가 최고의 치료제였다”고 보도했다.
베트남인 부두이퉁 씨(27)는 “대표팀 축구 경기가 열릴 때마다 베트남은 하나가 된다. 우리에게 자부심을 안겨주고 ‘파파(아버지)’처럼 선수들을 챙기는 박 감독은 영웅이다”라고 말했다. 박 감독은 선수들의 발을 마사지해 주고, 실수한 선수에게 질책보다 격려를 하는 ‘파파 리더십’으로 베트남을 사로잡았다.
박 감독은 결승에서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 또 하나의 장면을 연출했다. 3점 차로 앞선 후반 33분 상대의 거친 몸싸움에도 반칙을 선언하지 않는 심판에게 항의하다 퇴장당한 것이다. 베트남 언론은 “박 감독은 마치 새끼를 보호하는 닭과 같았다”고 보도했다.
축구에서 크게 앞선 팀 감독이 항의 끝에 퇴장당하는 경우는 드물다. 박 감독은 “3-0으로 앞서자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선수들이 나처럼 생각하면서 긴장이 풀리는 것을 막기 위해 강력히 항의했다. 솔직히 퇴장까지 줄지는 몰랐다”고 말했다.
박 감독과 선수들은 11일 특별기를 타고 베트남으로 금의환향했다. 귀국 직후 이들은 총리 관저를 찾아 만찬을 가졌다. 포상금도 비처럼 쏟아지고 있다. 베트남 뉴스에 따르면 베트남축구협회가 30억 동, 문화체육부가 10억 동을 포상금으로 내놨다. 여기에 민간 기업 후원금을 합하면 70억 동(약 3억6000만 원)이 넘는데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박 감독은 “‘베트남 정신’(단결, 투지 등)이 있었기에 우승할 수 있었다. 선수들이 팀과 자신을 믿고 국민의 성원에 보답했다”고 말했다.
연이은 성과에도 박 감독은 여전히 배가 고픈 듯하다. 2020 도쿄 올림픽 본선 진출(22세 이하 대표팀)과 2022 카타르 월드컵 최종 예선 진출(A대표팀)을 노린다. 둘 모두 베트남 축구가 한 번도 이뤄낸 적이 없는 일이다. 박 감독은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기 때문에 초심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정윤철 trigg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