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 과정을 보고 있으면 유체이탈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든다. ‘선언 대의원’ ‘승자다식’ ‘위성 코커스’ ‘폐쇄형 프라이머리’ 같은 용어는 난수표가 따로 없고 간접선거의 중층 구조인 제도 자체도 너무 복잡하다. 무엇보다 이렇게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사표(死票)가 발생하고 여론 왜곡 위험이 있는 간선제를 왜 유지하는지 의문이다.
이달 3일과 11일 미 중부 아이오와와 북동부 뉴햄프셔에서 열린 집권 공화당과 야당 민주당의 후보 선출 과정을 지켜보며 어렴풋하게나마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여행작가로 유명한 아이오와 출신 저술가 빌 브라이슨은 베스트셀러 ‘발칙한 미국 횡단기’에서 고향을 ‘전화번호부 두 권을 놓고 서면 다 보이는 곳’으로 묘사했다. 산과 고층 빌딩이 거의 없고 사방이 지평선일 만큼 평평하며 옥수수 밭이 가득한 아이오와의 상황을 익살스럽게 평했다. 뉴햄프셔 역시 엑서터나 세인트폴 같은 명문 사립학교,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다트머스대가 유명하다. 공부밖에 할 게 없는 곳이란 뜻이다.
뉴욕, 로스앤젤레스 같은 동·서부 해안 대도시의 관점에서 보면 두 곳 모두 ‘깡촌’ 이미지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의 지지율 선두권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모두 최대 도시 뉴욕 출신이다.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의 고향도 보스턴이다.
주요 후보 중 시골 태생은 인구 10만 명의 소도시인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에서 나고 자란 피트 부티지지 정도. 그조차 성인이 된 후엔 보스턴 근교의 하버드대를 다니고 매킨지컨설팅의 시카고 사무소에서 일하며 상당 기간 대도시에서 살았다.
3억3000만 미국인을 대표하겠다는 후보 대부분이 소수 대도시에만 익숙한 상황인데 대도시 아닌 곳에서 대형 정치 행사라도 치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인구가 적은 주의 소외 현상이 점점 심해질 것이다. 이곳 유권자들이 후보를 가까이서 마주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언론의 관심이 줄어 아이오와와 뉴햄프셔가 진짜 옥수수와 단풍만 유명한 곳인 줄 아는 과소표상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50개 주 538명의 대통령 선거인단을 단순히 인구 비례로만 배분하지 않고 아무리 작은 주라 해도 최소 3명을 보장해준 이유도 마찬가지다. 인구 1위 캘리포니아(3950만 명)는 50위 와이오밍(58만 명)보다 주민이 68배 많지만 선거인단은 55명 대 3명으로 약 18배 수준이다.
이처럼 미국인들은 현 대선 제도가 후보들에게 거대한 영토의 모든 유권자와의 접점을 넓혀주고 일부 대형 주가 국가 대사를 좌지우지하지 않도록 하는 ‘견제와 균형’의 근간이라고 믿는다. 양당이 굳이 수도 워싱턴에서 먼 아이오와와 뉴햄프셔에서 대선 후보 선출 과정을 시작하고, 민주당이 아이오와 코커스 때 사상 초유의 개표 지연 사태를 겪었음에도 ‘빠르고 투명하며 효율적인 직선제를 도입하자’는 여론이 높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얼핏 민주주의에 반하는 듯한 간선제가 갖가지 논란에도 240여 년간 유지된 비결이자 헌법 2조가 간선제를 보장하는 이유다.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달로 극소수 대도시의 집중 현상이 점점 심해지는 것도 소수 주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현 제도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1인 1표 직선제가 도입되면 양당 후보들은 캘리포니아, 텍사스, 플로리다, 뉴욕, 펜실베이니아 등 인구 1000만 명 이상인 주만 뻔질나게 찾고 버몬트, 와이오밍, 알래스카 같은 곳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가능성이 크다. 4년 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위스콘신(580만 명)에서의 승리를 자신한 나머지 이곳을 찾지 않았고 선거인단 10명 및 백악관 주인 자리를 도널드 트럼프 후보에게 넘겨줬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선출 절차와 집권당의 변경이 각종 제도와 법규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사태로 이어지지 않는 미국의 사회 구조야말로 간선제 유지의 최대 배경이 아닐까. 미국인도 아니면서 늘 미국인 이상으로 대선 판세와 결과를 심각하게 주시해야 하는 타국적자의 소감이다.
하정민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