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지금 우리가 위태롭다는 거야. 건수를 올려야 해! 이번 주에 오스틴에서 열리는 SXSW에 가지? 돈 많이 쓰지 말고.”
오아시스와 라디오헤드가 맹위를 떨치던 1997년, 영국 런던에 있는 글로벌 음반사 ‘유니그램’의 회의실 풍경. 스티븐(니컬러스 홀트)은 이 회사의 말단 A&R 직원이다. A&R는 ‘아티스트 앤드 레퍼투아’의 약자. 일반 회사라면 인재개발팀 정도로 통하겠지만 음반사라면 그 무게가 다르다. 인재, 즉 아티스트는 음반 산업의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오스틴에 가서 괜찮은 밴드들을 물어오면 넌 헤드(팀장)가 될 거야.”
스티븐의 어깨가 결릴 지경. 한마디로 부담감이 천근만근이다. 그는 SXSW로 향한다. 영화 ‘킬 유어 프렌즈’(2015년) 속 이야기다.
#1. ‘힙합, 트랜스, 양의 방광 위에서 연주하는 불가리아 헤비메탈…. 히트만 친다면 뭐든 상관없어.’
공연장에 들어서며 스티븐은 비장하게 독백한다. 이는 SXSW를 천박하나 적절하게 설명해낸다. 말 그대로 전 세계의 별의별 음악가가 모여 일주일간 2000건의 공연을 벌이는 음악 난장(亂場)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음반사, 언론사 관계자들이 매일 아침 독한 커피로 숙취를 달래며 늦은 밤까지 시내의 이런저런 공연장을 들쑤시고 다닌다. 신선하고 ‘뜰 것 같은’ 음악가를 발굴하기 위해서다.
#2. SXSW는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의 약자다. 우리말로 하면 ‘남남서(南南西)’. 말 그대로 미국의 남남서부 텍사스주 오스틴시에서 매년 열리는, 일종의 박람회다. 명칭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년)를 비튼 것. 영화제(SXSW 필름), 기업·기술 시장(SXSW 인터랙티브), 음악박람회(SXSW 뮤직)로 구성돼 있다. 스티븐이 절치부심하는 곳은 SXSW 뮤직이다.
#3. SXSW에 5년이나 참석했던 것은 기자로서, 음악 팬으로서 뜨거운 축복이었다. 그때의 강렬한 체험은 뇌와 혈관에 각인돼 거의 매일 꿈틀댄다. 지금은 스타가 된 영국 가수 두아 리파의 무명 시절 공연도 거기서 봤다. 관객 30명의 작은 라이브 클럽에서. 소극장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바 한쪽 공간에서 공연한 이들이 1∼3년 뒤 슈퍼스타가 되는 일이 SXSW에서는 다반사다. 인기와 청춘의 절정기를 지난 베테랑이 재기를 위해 애쓰는 무대들도 인상적이다. ‘Kiss Me’로 유명한 그룹 ‘식스 펜스 넌 더 리처’의 보컬 리 내시가 자그마한 호텔 바에서 남편의 통기타 반주에 맞춰 하던 공연이 기억난다. SXSW에서는 관객이 세 명이라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그 세 명이 유니버설뮤직 대표이사, 뉴욕타임스 전문기자, 라이브네이션 총괄이사일지도 모른다.
#4.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과 함께 전 세계 각종 공연과 페스티벌이 줄줄이 연기와 취소를 선언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SXSW와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이하 코첼라)’이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열리고 있어야 할 SXSW와 매년 4월 열리는 코첼라는 ‘축제들의 축제’다. 그해 음악시장의 판도를 예측할 전초전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인디오에서 열리는 코첼라는 연말까지 이어질 전 세계 매머드급 음악 축제들의 선봉장이자 맛보기다. 스타 출연진은 저마다 깜짝 놀랄 게스트를 무대에 올려 다음 날 언론에 자기 이름이 도배되길 원한다. 일종의 전장(戰場). 2016년 코첼라에 갔을 때, 이를테면 래퍼 아이스큐브의 공연을 보다 입에 머금은 맥주를 몇 번 뿜을 뻔했다. 전설의 힙합 그룹 N.W.A의 생존 멤버 전원에 켄드릭 라마까지, 튀어나오는 래퍼들마다 눈을 비비게 해서다.
#5. SXSW와 코첼라를 비롯한 여러 축제가 가을쯤으로 시기를 옮기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한다. 세계 대중음악계로서는 애피타이저가 사라진 정찬(正餐), 전주 없는 팝송 같은 해를 맞게 됐다. 길게는 향후 2, 3년의 팝 시장을 가늠할 견본시가 폐쇄된 셈이다.
하루빨리 이 지독한 병마가 물러가기를 기원한다. 이번 사태로 몸과 마음을 다친 분들에게 예술의 즐거움이라도 전달해 드리고 싶다. 그리고 벼락같은 행운과 축복을 받아 다 함께 2021년 SXSW와 코첼라에 갈 수 있기를…. 그나저나 위기의 스티븐은 어떻게 됐을까.
임희윤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