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는 던져졌다. 기록적인 압승으로 문재인 정권에 힘이 확 실리게 됐다. 그런데 과연 문 대통령 개인에게도 그럴까.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피할 수 없었던 5년 단임제의 수레바퀴가 문 대통령 앞으로 훅 굴러왔기 때문이다.
5년 단임 대통령 집권 후반기에 치러지는 총선은 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의 가속페달을 밟는다. 승패와 관계없이 여야에 새 진용(陣容)이 갖춰지면서 그동안 안갯속이었던 미래권력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박근혜 집권 후반기인 1996년, 2000년, 2012년, 2016년 총선 이후부터 대통령의 권력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누수되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시간도 많지 않다. 차기 대통령 선거일이 2022년 3월 9일. 2년도 남지 않았다. 역대 정권 말에 그랬듯, 내년 초부터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대선 국면으로 빠져들 것이다. 문 대통령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시간도 올해 말까지인 셈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레임덕을 곁에서 지켜본 문 대통령. 자신의 레임덕도 피할 수 없는 숙명임을 잘 알 터. 이 때문에 일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조급함에 올해 안에 남북 화해와 대중(對中) 밀착, 소위 검찰 개혁과 주류세력 교체라는 숙원사업의 성과를 내기 위해 무리수를 두지 않을까 우려된다.
여당 압승에 대한 대통령의 일성(一聲). “국민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겠다”였다. 그 말이 독주의 방아쇠가 아니길 바란다. 무엇보다 문 대통령은 총선 승리가 키울지 모를 휴브리스(권력자의 오만)를 경계해야 한다. 그 휴브리스 때문에 임기 말이나 그 이후, 질곡에 빠진 권력자의 모습을 우리는 충분히 봐왔다.
문 대통령, 나아가 문 정권이 오만해서는 안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이번 총선 지역구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163석, 미래통합당은 그 절반가량인 84석을 얻었다. 그런데 전국 253개 지역구 총 득표율은 민주당이 49.9%, 통합당이 41.4%로 8.5%포인트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많은 경합지역에서 민주당 후보가 근소한 표 차로 승리해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비례정당 득표율도 비슷하다. 범진보진영이 50% 남짓, 범보수진영이 40% 남짓으로 10%포인트 정도 차이다. 즉 보수 정치세력은 궤멸됐어도 보수 표심이 궤멸된 건 아니라는 뜻이다. 문 정권은 아직도 40%가량의 비판적 국민이 엄존함을 새기고 향후 국정에 임해야 한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직접 견제를 해야 할 보수 정치는 무너졌다. 안 그래도 보수 정치, 너무 낡고 늙었다. 선거에서 미래통합당 후보를 찍은 많은 사람들도 그 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정권의 폭주가 싫어서였다.
민주당은 공천에서 청와대 출신 ‘문돌이’, 친문·친조국 성향의 청년과 기업인 판사 경찰 출신 등으로라도 물갈이가 있었다. 통합당에선 무슨 물갈이가 있었나. 개표 방송을 보면서 저런 구(舊)정치인도 통합당 공천을 받았나,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개중에는 지역 표심이 워낙 유리해 당선된 사람들도 있지만, 수도권에서 통합당의 꼰대 이미지만 부각시켰을 뿐이다.
더구나 선거가 임박해 조급해지자 여든 살의 김종인 씨를 영입해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더니, 선거에 참패하자 이번엔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기자고 한다. 심지어 다른 당 대표인 안철수 씨가 비대위원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여기에 지난 대선 참패의 주역인 무소속 홍준표 당선자는 벌써부터 ‘통합당 복당 후 대권 도전’ 의사마저 내비친다. 도대체 이게 뭔가.
그렇게 깨지고도 모르나. 이번 총선의 메시지는 자명하다. 통합당의 정책이나 비전보다 꼰대 이미지 풀풀 풍기는 사람이 싫은 것이다. 아니, 통합당 자체가 싫다고 해야 하나. 확 갈아엎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그러려면 먼저 비대위원장부터 눈길을 끌 만한 인물을 세우고 차기 대선 레이스에서 중도 표심까지 확장성 있는 대선후보감을 올해 안에 키워야 한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이번 총선을 통해 박근혜의 잔재를 털고 갈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탄핵의 과거를 털고 당명대로 ‘미래’와 ‘통합’으로 나갈 수 있는 새 인물, 그의 삶에 스토리가 있고 3040세대와 중도 표심에도 어필할 수 있는 참신한 대선후보를 키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망가진 보수정치를 하루라도 빨리 추스르는 길이다.
박제균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