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독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6월 독일 쾰른역에서였다. 앙숙 스웨덴과의 경기를 앞둔 잉글랜드 팬 수만 명이 모여들었다. 상의를 벗어던진 채 깃발을 흔드는 팬들이 쾰른역 앞 광장을 가득 채웠다. 일부는 이미 술에 취했다. 인근 경기장으로 향하는 전철도 잉글랜드 축구팬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라이벌과의 경기를 앞두고 느끼는 흥분감, 여럿이 함께 구호를 외치거나 소리를 지르며 빚어내는 소란스러움 등이 전철 안을 비일상적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 속에서 일탈 행위도 일어났다. 갈색 피부의 히잡을 쓴 이슬람계 여성 두 명이 어느 역에서 내리려 할 때였다. 키가 2m는 되어 보이는 덩치 큰 백인 남자가 전철 문을 가로막았다. 승객 가운데 그곳에서 내리려는 사람은 그 두 명뿐이었는데, 그는 비켜주지 않았다. 주변의 친구들과 무언가 왁자지껄 떠들며 폭소를 터뜨렸다. 당황한 여성들은 끝내 그곳에서 내리지 못했고 울면서 비켜 달라고 한 뒤에야 다음 역에서 내릴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에 대한 거친 행동이었다. 백인 남성 혹은 백인 여성이었다면 그렇게 했을까. 인종에 대한, 약자 및 소수에 대한 무례함과 폭력이 마구 뒤섞여 나온 그런 행동들은 두려웠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은 국제축구연맹(FIFA)이 본격적으로 인종차별과의 전쟁을 선포한 때다. 이때부터 선수나 관중이 특정 팀이나 선수를 상대로 인종차별적 언동을 했을 경우 해당 팀의 승점을 3점 깎는 ‘신인종차별 금지 규정’이 마련됐다. FIFA는 경기장 곳곳에 ‘인종차별에 반대한다(Say no to Racism)’란 구호를 내걸고 선수들로 하여금 인종차별 반대 선서를 하게 했다. 축구계의 인종차별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전철 안 장면처럼 일상 속을 파고든 인종 및 특정 국가와 민족에 대한 차별 의식이 경기장의 격렬한 분위기 속에 휩싸여 툭하면 터져 나오곤 했던 것이다.
수십 년 전 활동했던 축구황제 펠레(80·브라질)도 여러 차례 인종차별을 겪었다고 밝혔다. 관중이 유색인인 자신을 원숭이로 불렀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인종차별은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그중 유명한 사건 중 하나는 2014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FC바르셀로나에서 뛰고 있던 다니 아우베스(37·브라질)에게 관중이 바나나를 던진 것이다. 유색인인 그를 조롱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우베스는 태연하게 바나나를 주워 한입 먹고 던져 버리고는 다시 공을 찼다. 조롱을 무시해 버린 아우베스는 많은 격려를 받았다.
하지만 다만 무시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인간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인종차별은 깊은 모멸감과 상처를 안긴다. 이탈리아 세리에A 브레시아에서 뛰고 있는 마리오 발로텔리(30·이탈리아)가 지난해 말 관중으로부터 원숭이 울음소리를 듣고 관중석으로 공을 차버린 것은 ‘악동’으로 불리는 그의 성격이 과격해서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종차별은 흑인뿐만 아니라 아시아 선수들에게도 저질러지고 있다. 한국의 슈퍼스타 손흥민(28·토트넘)도 인종차별 논란을 겪은 적이 있다. 이동국(41·전북)과 이강인(19·발렌시아)이 최근 경찰의 가혹 행위로 숨진 미국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위한 세리머니에 동참한 것은 인종차별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일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스포츠는 인권을 위한 싸움을 위해 활용될 수 있다”고 했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스포츠 현장이 지니는 파급력을 언급한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식의 전환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독일 월드컵의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에 동참했던 유니세프는 “인종차별이란 성(性), 인종, 장애인 등에 대해 어려서부터 길러진 편견의 산물”이라고 했다. 인종차별은 비과학적이며 문화적 편견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어릴 때부터 모두가 하나 되어 어울리는 스포츠 현장을 보고 겪으며 자라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체험들이 그러한 편견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스포츠는 육체의 대결 현장뿐만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 발전의 현장이 될 수 있다.
이원홍 blue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