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이정재(48)만큼 명대사가 많은 배우가 또 있을까. ‘신세계’의 “중구 형, 이거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관상’의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암살’의 “내 몸속에 일본 놈들의 총알이 여섯 개나 박혀 있습니다”까지. 영화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그의 대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이정재가 연기한 캐릭터는 대중에게 늘 진한 여운을 남겼다.
단순히 대사의 힘만은 아니다.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과 살 떨리는 독기가 공존하는 눈빛, 걸걸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얹히면서 몇 글자 안 되는 대사는 비로소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텍스트를 깨고 나온다.
찍는 작품마다 ‘인생 캐릭터’를 경신하는 이정재가 이번엔 살기(殺氣)만 남은 추격자 ‘레이’를 연기했다. 다음 달 5일 개봉하는 홍원찬 감독의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다. 레이는 살인청부업자 인남(황정민)이 자신의 형을 죽인 것을 계기로 인남을 둘러싼 모든 이들을 추격하고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른다. 한국 누아르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신세계’ 이후 두 배우의 7년 만의 재결합으로도 화제가 됐다.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재는 레이를 ‘사냥감을 쫓는 맹수’에 비유했다.
“인남과 그의 가족, 지인들을 쫓는 레이가 살인을 저지르는 목적에 과연 형을 위한 복수만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했다. 복수는 핑계일 뿐이다. 레이는 사냥감을 찾고 있던 맹수이고, 그런 그에게 살인을 저지를 아주 적절한 핑계가 생긴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잔인함이 느껴지는 인물로 레이를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레이의 첫 등장은 ‘관상’의 수양대군 등장 신(Scene·장면)을 뛰어넘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푹 팬 볼, 목을 뒤덮은 문신, 발목까지 오는 흰색 코트를 걸친 채 유유히 형의 장례식장에 등장한 레이는 주검이 된 형을 온기라곤 없는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본다. “첫 등장부터 캐릭터에 이입돼야 러닝타임 동안 관객이 캐릭터와 같이 호흡할 수 있다”는 그는 장례식장에서 입을 복장도 직접 골랐다.
“장례식장에서 모두 검은색 옷을 입는다고 생각하지만 ‘맹목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레이가 과연 그런 걸 신경 쓸까?’를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답은 ‘아니다’였다. 그래서 일부러 흰 코트를 택했다. 최대한 피곤하고 감정이 소모된 레이의 얼굴이 필요해 전날부터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20여 년간 1000만 관객 돌파 영화 4편을 찍고, 주·조연을 넘나들며 캐릭터의 성을 쌓아온 그가 이제 조금은 내려놔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해본 적 없는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김재희 j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