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빈 페이지가 더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영화 ‘패터슨’ 중
버스운전사 패터슨은 자신의 수첩에 매일매일 틈나는 대로 시를 썼다. 반려견 ‘마빈’이 그 수첩을 갈가리 찢어놓기 전까지 말이다. 낙담한 패터슨은 산책길에 우연히 마주친 낯선 남자에게 새 노트를 선물 받는다. 그리고 그는 그 노트에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장편만화를 만들고 있다. 몇 년째 붙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마감 날짜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완성 후 출판이 약속된 것도 아니다. 그 불확실함 때문일까. 끝내주는 만화를 만들겠다는 초심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이거라도 해야지 하면서 작업실에 꾸역꾸역 출근하고 있다. 출근길에는 커피 없이 일할 수 없다면서 카페에 들렀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는 손을 푼다면서 스케치북에 낙서를 실컷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다시 펼쳐 본 장편만화 원고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작업실에는 장편만화 원고를 갈가리 찢어 놓을 마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 곁에 분명 있던 무언가가 없어진 것만 같았다. 원고는 텅 빈 노트처럼 아득해 보였다. 그제야 내가 너무 오래 손을 놓고 있었다는 자괴감이 들었고, 이미 만들어 놓은 원고도 몽땅 엎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은 나를 어느새 작업실로 끌고 와 책상 앞에 다시 앉혔다. 그건 패터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매일 아침 아내와 시시한 대화를 나누고, 버스를 운전하고, 혼자 점심을 먹고, 개를 산책시키던 패터슨에게 작업실은 곧 수첩이었다. 비록 아끼던 수첩은 사라졌지만, 그의 시는 수첩이 아닌 일상 곳곳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나의 이야기도 그런 식으로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 곳곳에 숨어 있다. 때때로 텅 빈 노트처럼 아득해 보이던 장편만화 원고가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