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듯 여겼던 존재의 가치는 잃어봐야 절감한다. 지난해 이맘때처럼 개인의 선택과 판단에 따라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날이 과연 돌아올까. 그 바람이 요원할수록 국경 너머 여행담을 담은 답사기의 대리만족도 유용해진다.
부부 건축가인 노은주 임형남 가온건축 공동대표가 최근 펴낸 ‘도시 인문학’(인물과사상사·사진)은 도시라는 표제 아래 해당 공간과 느슨한 연결고리를 가진 여러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잡학에 밝은 건축가 친구와 편안히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가 두런두런 이어내는 도시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을 전한다.
미국 시애틀, 네덜란드 스헤인덜, 일본 나오시마(直島) 등 책에 소개한 13개 나라 21개 도시에 대해 임 대표는 e메일 인터뷰에서 “건축적 가치보다는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기억하는 도시, 사람들에게 들려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간직한 도시를 골랐다”고 했다.
“사람들은 도시에 살면서 도시를 저주한다. 자연과의 대척점으로, 비인간적이고 유해한 시스템으로 도시를 바라보는 이상한 이분법을 적용한다. 하지만 미국 건축가 루이스 칸(1901∼1974)은 ‘좋은 도시는 거리를 걷는 소년에게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일깨워주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도시는 직접 펼쳐 읽어야 진면목을 보여주는, 두툼한 이야기책과 같다.”
오랫동안 가보길 염원했던 도시일지라도 실제로 체험하는 여행에서는 충분히 머물 여유가 주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들도 여느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단체 견학, 업무 출장, 어렵게 짬을 내 예약한 패키지투어를 활용했다. 터키 코니아의 상인 휴식처인 ‘술탄 한 카라반사라이’는 빡빡한 패키지투어 버스 이동 도중 20분의 정차시간을 틈타 서둘러 뛰어가서 살펴본 곳이다.
“대리석을 다듬어 쌓아올린 작은 성채와 같은 장방형 건축물의 널찍한 중앙정원 복판에 섬처럼 우뚝 솟은 직육면체 키오스크 모스크(이슬람 기도실)가 있다. 이 건물은 1229년에 시리아 건축가인 무함마드 이븐 칼완 알디마슈키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역사 속 기록이 아닌 실크로드의 실재하는 흔적을 눈으로 확인하고 만져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임 대표는 “도시의 구조는 여러 시간 층위가 겹쳐져 생겨난 것이다. 발로 체험하며 그 이면의 질서를 읽는 일은 늘 흥미롭다.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다면 에게해 연안 지역의 여행자가 드문 도시에 오래 머무르며 터키 에페수스의 도서관 유적지를 방문해 보고 싶다”고 했다.
손택균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