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용서의 모범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달에 개봉한 영화 ‘모리타니안’의 주인공이 그러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화가 바탕으로 하고 있는 ‘관타나모 일기’의 저자 모하메두 울드 슬라히가 그러하다.
슬라히는 그의 조국 모리타니아에서 미국 정보기관에 납치됐다. 그리고 14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쿠바에 위치한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구금당했다. 단순한 구금이 아니라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에나 나옴 직한 초현실적인 공포와 위협이 일상이었다. 제네바 협약에 위배되는 불법적인 구금이었지만 9·11 때문에 이성을 잃은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법 위에 법을 만들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고문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를 남자 죄수들만 있는 그곳으로 끌고 와서 성폭력에 노출시키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테러와의 연관성을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죄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2002년에 납치된 슬라히는 2016년에야 풀려났다. 삼십대 초반이었던 남자는 사십대 중반이 넘어 있었다. 그 사이에 그를 애타게 그리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영화를 보거나 ‘관타나모 일기’를 읽으면 그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국가나 사람들을 증오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런데 그는 증오와 복수심이 있어야 할 자리에 용서를 놓았다. 그러한 몸짓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가 하는 말에 실마리가 있다. “나는 용서하려고 합니다. 용서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의 신 알라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고문한 사람들에게 원한이 없습니다. 아랍어에서 자유와 용서는 같은 말입니다.” 그가 믿고 기대는 종교가 원한이나 복수가 아니라 용서 쪽으로 그의 등을 떠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용서할 수 있으려면 원한이나 복수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했다. 그래서 용서와 자유, 자유와 용서가 동의어라는 거다. 그야말로 눈부신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