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님이 장미꽃이라면 정진석 추기경님은 안개꽃 같은 존재였죠.”
시인이자 수도자인 이해인 수녀(76)는 29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선종(善終)을 애도하며 이처럼 비유했다.
그와 정 추기경의 인연은 2006년으로 거슬러 간다. 당시 정 추기경 착좌(着座) 행사에 사용할 곡의 노랫말을 의뢰받은 것. 이 수녀는 “음악을 맡은 신부님의 부탁으로 추기경님만을 위한 노랫말을 만들었다. 정 추기경께서 ‘좋은 노랫말을 써주고 행사 참석을 위해 부산에서 먼 길을 와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다”고 전했다.
그 뒤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정 추기경의 여러 책을 통해 신학적인 물음에 대한 도움과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정 추기경님은 생명윤리를 지키고 교회가 어려운 이웃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도록 힘썼다. 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추기경님이 고위 성직자로 바쁜 중에도 매년 책을 출간해 51권의 저서를 냈다는 게 놀랍다. 성직자이자 학자로 잠시의 시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증표 아니겠나.”
그는 동아일보에 게재된 정 추기경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대를 이은 안구 기증에 얽힌 사연을 다룬 허영엽 신부 추모글(29일자 A10면)에 감동을 받았다며 “6·25전쟁 중 세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외동아들이라는 부담 속에서도 더 큰 사랑을 선택한 젊은 시절 추기경님의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이 수녀는 2018년 연명 치료를 거부한 정 추기경의 결정이 수도원 내에서도 큰 화제였다고 전했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라는 말도 있지 않나. 수도원에 나이 든 수도자들이 많다 보니 남 일이 아니다. 추기경님의 선종을 지켜보면서 연명 치료를 거부하겠다고 서약하거나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하자는 다짐이 많다.”
이 수녀는 2009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도 떠올렸다. 암 치료를 위해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해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받던 힘든 시기였다. 마침 김 추기경도 병실에 있어 ‘입원 동기’ ‘환우(患友)’라고 했다고 한다. “하루는 힘들어 기도를 부탁드렸더니 너무 길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왜 이렇게 기냐고 했더니 ‘글 잘 쓰는 수녀니 하느님께 특별히 잘 봐달라고 부탁했어’라며 웃으시더군요.”
이 수녀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김 추기경은 아버지, 정 추기경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는 말에 공감한다”고 했다. 시인은 두 추기경의 삶을 꽃에 비유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님이 유머를 갖춘 카리스마의 장미꽃이라면 정 추기경님은 사람들에게 여유와 위로를 주는 은은한 안개꽃 같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의 큰어른들이 차례로 선종하고 있어 안타깝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직접 조문은 못 하지만 수도원 내 동산을 돌며 묵상으로 정 추기경님을 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 수녀는 1990년대 중반 피아니스트인 신수정 서울대 명예교수 소개로 알게 된 배우 윤여정 씨와의 인연도 소개했다. “서울에 가면 신 교수 자택에서 식사 모임을 갖는데, 어머니가 가톨릭 신자인 윤여정에게 율리아나라는 세례명을 권하며 신앙을 가지라고 조르곤 했죠.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뒤에는 ‘세례받으라고 당분간 안 조르겠다. 그동안 수고했고 마음껏 당당하게 즐기라’는 문자를 보냈어요. 바쁜지 아직 답은 없네요.”
김갑식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