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얼굴의 소녀가 화면 밖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머리에 쓴 가발에는 하얀 나비 리본들이 잔뜩 달려 있다. 장식도 과하고 무게도 상당해 보인다. 큰 가발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는 아이의 이름은 마리아 테레사. 스페인 펠리페 4세의 딸이다. 어린 왕녀는 왜 저리 무거운 가발을 쓰고 있는 걸까?
벨라스케스는 17세기 스페인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다.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로 활동하며 수많은 왕족들의 초상화를 남겼다. 이 그림 속 모델인 테레사는 여덟 살 때 왕위 계승자가 됐다. 근친혼의 영향인지 스페인 왕실 일원들은 장애를 갖거나 병으로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테레사의 어머니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유일한 왕실 후계자였던 오빠 발타사르도 10대 나이에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사촌 언니가 새어머니가 되어 아들을 낳기 전까지 그녀는 공식적인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였다.
이 그림은 공주가 결혼 적령기에 가까워지던 13세 무렵에 그려졌다. 스페인 왕실과 혼사를 맺고 싶었던 유럽 각국 왕실들이 공주의 초상화를 원했기에, 벨라스케스는 잠재적 남편감들에게 보내기 위해 여러 점을 그려야 했다. 머리에 쓴 나비 장식 가발은 공주를 홍보하기 위한 장치다. 문화권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나비는 변신, 희망, 기쁨, 사랑, 영혼, 젊은 여성 등을 상징한다. 특히 어린 소녀의 가발에 달린 나비는 생산 가능성, 즉 다산의 능력을 의미했다. 원래는 흉상으로 그려진 초상화였지만 머리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아래는 잘라냈다.
테레사는 1660년 사촌인 루이 14세와 결혼해 프랑스의 왕비가 됐다. 이듬해 왕세자를 낳고 이후 2남 3녀를 더 낳는 등 다산에는 성공했으나 왕세자를 제외한 모든 자녀들이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남편은 수많은 애첩을 두었기에 그녀는 평생 외롭게 살다가 44세에 사망했다. 나비 장식의 무거운 가발은 그녀가 평생 견뎌야 할 권력의 무게를 상징할 뿐, 결코 사랑이나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