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제 이전, 관리 등용은 지방관이 추천한 효자나 청렴한 아전들을 중앙에서 심사해서 결정하거나, 국가에 공을 세운 가문의 자제들을 특별 채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문벌 중시 풍조가 팽배했던 위진(魏晉) 시대에는 당사자의 능력과 무관하게 가문의 위세로 관리가 되는 게 상례였다. 하지만 과거제는 가문의 배경과 상관없이 보통 집안의 선비들도 순전히 능력 하나로 관리가 될 수 있는 꿈의 무대였다. 각지의 수재들이 몰려들었고 급제를 위해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로 시험에 매달리는 선비도 적지 않았다. ‘진사과는 오십에 급제해도 이르다’는 말이 이래서 나왔다. 당 고종 때 재상까지 지낸 설원초(薛元超)도 평생의 여한으로 자신이 ‘진사에 급제하지 못한 것’을 꼽을 정도였다. 스스로 ‘문음(門蔭·가문의 음덕)’으로 관직에 오른 데 대한 뼈아픈 자책이었을 것이다.
과거 시험의 위상이 그랬으니 10년간 응시해 왔던 시인이 급제 직후 환호작약한 건 당연지사. 그가 보기에 급제는 관리가 승진을 거듭하며 수차 자리를 옮기는 것보다 더 대단하다. 기세등등 고향 친구에게 ‘두 눈 씻고 날 보라’고 외친다. 이제 자신을 괄목상대(刮目相對)하라는 거다. 한때 시인의 재능을 인정하고 과거 응시까지 권유했던 이신(李紳)이 우연히 이 시를 접하고 충고의 시 한 수를 보냈다. ‘가짜 금을 진금(眞金)으로 도금하는 법, 진금이라면 도금할 필요가 없지. 십년 만에 장안에서 겨우 급제했거늘, 빈속에 왜 그리 잘난 체하시나.’